웜홀과 기독교
오늘 교회로 가는 길에 주유소 전광판을 보았다. 1.92$ 무거운 삶이 더 무거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전광판에 찍힌 1.92$라는 숫자 앞에서 우주의 근원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일지 모른다. 당장 시급 1달러가 아쉽고, 영혼의 갈증보다는 시원한 콜라 한 잔의 달콤함이 더 절실한 것이 우리네 이민자의 삶이자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이다.
하지만 최근 물리학계에서 들려오는 '웜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팍팍한 현실이 사실은 얼마나 경이로운 확률의 산물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Wormholes may not exist—we've found they reveal something deeper about time and the universe )
영화 속 우주 여행의 지름길로 묘사되던 웜홀(Wormhole)은 어쩌면 실재하는 통로가 아닐지도 모른다. 대신 웜홀은 '양자 얽힘'이라는 미시 세계의 기묘한 현상을 거시적인 시공간의 언어로 번역해 보여주는 일종의 '수학적 거울'에 가깝다.
이는 시공간 자체가 우주의 근본 토대가 아니라, 수많은 양자 정보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나타나는 '창발적(Emergent)' 현상일 수 있다는 가설로 이어진다. 나아가 우리 우주가 더 큰 순환(순환우주: Conformal Cyclic Cosmology)의 한 장면일 수 있다는 암시까지 품고 있다.
시공간이 정보의 결합이라면, “이 정보는 이전 우주에서 온 것일까?”라는 질문은 대답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현 우주라는 인과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환우주 가설은 증명하기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과학의 발전은 점점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모순 아닌 모순을 낳는다. 그래서 인간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하지만, 답을 정해 놓고 근원을 찾으려 하는 방법론은 그 한계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우주, 이 시간 안에서만 생각해보자. 여기서 흥미로운 관점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가 마주하는 이 우주의 견고한 물리 법칙은 압도적인 확률인 '메이저(Major)'의 결과물이다. 반면,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나 미시 세계의 불확실성은 로또 당첨보다 희박한 확률인 '마이너(Minor)'의 영역이다. 우주는 이 메이저한 흐름을 통해 보편적 질서를 유지하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는 늘 마이너한 가능성의 틈새를 숨기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논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삶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플 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난 1만 년의 역사 속에서 인류는 우주의 기원을 몰라도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자식을 키우며 잘 살아왔다. "경치가 밥 먹여주냐"는 냉소처럼, 현 우주의 양자역학을 이해한다고 해서 집으로 쌀이 배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매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은 양자역학의 산물이며, 길을 찾게 해주는 GPS는 상대성 이론의 증거이다. 현대인은 이미 과학의 '병'과 '약'을 동시에 삼키며, 그 근원적 원리에는 눈을 감은 채 실용의 단물만 마시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 주목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생물에서 생명으로, 다시 자아를 인식하는 '지성'으로의 진화는 메이저한 흐름이라기보다 극악의 확률을 뚫고 나온 '마이너한 행운'에 가깝다. 우주가 이토록 광활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외계 지성체의 신호를 포착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지구라는 이 작은 행성에서 일어난 '의식의 창발'이 전 우주를 통틀어 유일한 마이너 사건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과학은 비로소 신학의 옷을 입는다. 이토록 정교하고 희박한 확률적 선택이 겹쳐 인류가 탄생했다면, 그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논리적인 귀결일 수 있다. 80억 분의 1의 확률로 태어난 개인이 모여 우주의 근원을 묻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창조주가 심어놓은 '의식의 등불'이 아닐까 한다.
결국 우리가 1.92달러의 기름값에 한숨 쉬면서도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주의 신비를 궁금해하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마이너의 신성' 때문일 것이다. 기복 신앙의 한계에 갇혀 "주옵소서"라고 기도할지언정, 그 근원을 찾으려 애쓰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그 자체로 가장 고귀한 '믿음'이자 '신앙'의 여정이다.
비록 양자역학이 당장 쌀을 배달해주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왜 이 쌀을 먹으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밥맛 나는 이유'는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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