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 – SF 가면을 쓴 우주 무협지
《은하영웅전설》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일본 작가 다나카 요시키(田中芳樹)가 쓴 'SF의 가면을 쓴 무협지'다. 따라서 과학적 배경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저 소설의 시대 배경이 미래이고, 무대가 우주일 뿐이다. 소설로 먼저 나왔고 애니메이션은 2번이나 리메이크되었다. PC게임으로 시리즈 6까지 나왔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엄청난 재미를 보장한다.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군상극 - 권모술수와 암투, 뜨거운 의리와 처절한 배신 - 이 우주라는 거대한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할리우드의 《스타워즈》 시리즈가 세계적인 인기를 끈 이유 역시 복잡한 과학적 설정이 아니라, 배경만 미래일 뿐 본질은 신화이자 판타지였기 때문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과거 내가 SF 소설 《스페이스 2223》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도 바로 이 《은하영웅전설》이었다. 하지만 내 책이 대중적으로 널리 팔리지 못했던 이유를 복기해 보면, 나름대로 최대한 자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SF적인 엄밀함'에 치중했던 탓이 아닐까 싶다. 결국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딱딱한 과학 기술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 이야기'인데, 창작자로서 그 본질을 조금 간과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워낙 방대해서, 제대로 요약하자면 그 자체로 책 한 권이 나올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그를 통해 내 인생의 기록들을 남겨두는 의미에서,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 거대한 대서사시의 뼈대를 기억나는 대로 차근차근 짚어보려 한다.
줄거리(시간을 따라서)
1) 배경
인류는 지구를 떠나서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한다. 그 첫 행성이 발할라였다. 인간은 거기서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고, 순차적으로 인근의 다른 태양계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 체계의 은하연방이 설립된다.
해적 소탕등으로 명예를 얻은 루돌트 골덴바움 장군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가 시작된다.
이에 반발한 공화주의자들이 탈출하여 발할라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태양계에서 거주에 적합한 행성을 발견하고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하이네센이라고 명령한다. 순차적으로 인근 태양계에 정착하기 시작하고 자유행성동맹이 결성된다.
오랜 시간 동안, 두 문명은 서로 접촉하지 않았지만 결국 조우한다. 제국과 동맹의 영토를 잇는 길은 딱 2곳이다. 그 중 하나는 이제르론 회랑이고 그곳을 선점한 제국은 난공불락 인공행성 이제르론 요새를 건설하고 동맹의 제국 칩임을 방어한다. 또 하나는 페잔 회랑이다. 이 곳에는 태양계가 존재하며 거주 가능한 행성 페잔이 있다. 페잔은 형식적으로는 제국에 속했지만, 사실상 군대가 없는 중립 독립 국가였다. 따라서 이 페잔 회랑은 군사적 이용으로의 사용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페잔은 제국과 동맹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는다.
2) 두 주인공의 탄생
이 소설은 두명의 주인공이 있다. 마치 초한지의 항우와 유방과 같다.
평범하게 생긴 양웬리는 동맹에서 태어났다. 무역상 아버지를 따라서 우주를 누볐고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망으로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없었던 그는, 등록금이 없는 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전쟁역사를 전공한다. 하지만, 그 과는 곧 폐과되고, 양웬리는 전쟁전략과로 이전한다. 양웬리의 성적은 중간 정도였지만, 전략 과목에서만큼은 우수한 성적을 보인다.
9년뒤, 금발의 절대적인 미남 외모를 지닌 라인하르트 폰 뮤젤이 제국에서 태어났다. 귀족이었지만, 몰락한 귀족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의 옆집에서 지크프리드 키리히아이스라는 붉은 머리의 평민이 살고 있었다. 둘은 친구가 된다. 어느날 라인하르트의 누이인 안네 로제가 황제의 후궁으로 팔려갔다. 라인하르트는 분노에 떨며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친구인 키리히아이스 함께 유년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양웬리 중위는 부임한 행성 엘파실에서 특별한 소임이 없는 한직을 맡고 있었다. 제국이 엘파실을 침공하자 당시 엘파실 책임자 였던 린치 소장은 민간인을 포기하고 자신들만의 탈출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민간인 탈출 계획을 양웬리 중위에게 맡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린치 소장은 제국의 포로가 되고, 양웬리는 민간인들을 무사히 탈출시키며 일약 ‘엘파실의 영웅’이 되고 소령으로 특진한다. 이 때 훗날 부관이자 아내가 되는 프레데리카 그린힐을 만나게 된다.
유년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아직 10대의 라인하르트 폰 뮤젤은 바로 소위로 임관한다. 라인하르트의 누나인 안네 로제를 시기한 세력이 라인하르트를 제거하기 위해서 매우 위험한 카프라첸가 행성에 부임시키지만, 라인하르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유행성동맹군 지휘관을 생포함으로써 본인은 중위로 키리히아이스는 소위로 진급한다.
3) 두 주인공의 성장
첫 전공을 세운 두 천재는 각자의 진영에서 독보적인 족적을 남기며 성장한다.
제국군의 라인하르트는 누나를 시기하는 문벌 귀족들의 끊임없는 음모와 암살 시도를 천재적인 전술로 정면 돌파하며 승리를 거듭하고 상급대장(별4+)의 지위에 오른다.
반면, 동맹군의 양 웬리는 출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퇴역 후 연금 생활'만을 바라보지만, 막장으로 치닫는 동맹군 상부의 무능함 덕분에 원치 않는 승진을 거듭하여 준장(별 1)에 오른다.
4) 두 주인공의 만남, 라인하르트의 원수 진급
제국의 신성으로 떠오른 라인하르트가 이끄는 제국군과 동맹군이 '아스타테 회전'에서 격돌한다. 라인하르트의 함대느는 각개격파 전술로 동맹군 3개 함대들을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가지만, 부상당한 사령관을 대신해 지휘권을 잡은 양 웬리의 임기응변에 가로막혀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두 천재가 서로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한 첫 만남이었다.
이 전투의 공로로 라인하르트는 20세의 나이에 제국군 우주함대 부사령관이자 군 최고의 계급인 '원수'로 진급하며, '로엔그람' 백작 가문을 계승한다. 그에 휘하에는 제국의 젊고 실력 있는 장군들, 미터마이터, 로이엔탈, 캠프, 뮐러, 비텐벨트, 아이젠나흐, 오베르슈타인과 같은 이들이 집결한다. 키리히아이스는 지방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중장으로 진급하여 2인자가 된다.
5) 양 웬리의 이제르론 요새 점령과 동맹의 대실패
동맹으로 돌아온 양 웬리는 소장으로 진급하고 새로 창설된 제13함대의 사령관이 되어,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제국의 '이제르론 요새' 공략 명령을 받는다. 양 웬리는 반 쪽자리 함대로 공략에 나선다. 그는 육병전 부대인 '장미의 기사단'을 이용한 기만전술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요새를 함락시키는 기적을 선보인다. 이로써 제국에는 '상승(常勝)의 라인하르트', 동맹에는 '불패(不敗)의 양'이라는 대칭축이 완성된다.
승리에 도취된 동맹 정부와 군 상부는 국민들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무모한 '제국 영토 대원정'을 감행한다. 하지만 이를 미리 예측하고 라인하르트는 청야전술로 동맹군을 제국군 영토 깊숙한 곳에 끌여들인 뒤에, 보급이 끊긴 동맹군을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후퇴하는 동맹군은 암릿처 성계에 집결하고 제국의 파상 공세로 말미암아 동맹군은 보로딘, 우란프 등 수많은 명장과 병력을 잃고 회복 불능의 대참패를 당한다. 다만, 양웬리의 13함대와 뷰코크 중장의 5함대만 병력을 보존한다. 양과 절친했던 훌륭한 인성을 지닌 뷰코크는 대장으로 진급하고 군부의 1인자가 된다.
6) 제국 내의 반란(키리히아이스의 죽음)과 동맹 내의 쿠데타
대원정의 여파로 양 진영 모두 내부 진통을 겪는다.
황제가 서거하자 라인하르트는 구 귀족 세력(립슈타트 동맹)과 내전에 돌입한다. 천재적인 전략으로 귀족 연합군을 진압하고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지만, 이 과정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자신의 절반이었던 지크프리트 키리히아이스를 암살자의 총격으로 잃고 만다. 라인하르트는 깊은 슬픔에 잠기며 얼음처럼 차가운 패왕으로 거듭난다.
제국이 보낸 린치(과거 엘 파실의 그 장군)의 공작으로 인해 군부 보수파가 '구국군사회의 쿠데타'를 일으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쿠데타의 수장은 프레데리카의 아버지인 드와이트 그린힐 대장이었다. 양 웬리는 씁쓸함을 머금고 군 선배이자 미래의 장인이 될 세력을 진압하며 동맹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만, 동맹의 국력은 바닥을 드러낸다.
7) 제국의 이제르론 요새 공략 실패
제국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라인하르트는 눈엣가시 같은 이제르론 요새를 되찾기 위해 켐프와 뮐러 두 장군에게 '요새 대 요새'라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명령한다. 이동식 요새인 가이에스부르크 요새를 워프 시켜 이제르론 요새와 직접 부딪히게 만든 대규모 전투였다.
이와 동시에 제국은 정략에 눈이 먼 동맹 정부 정치인들을 이용하여 양 웬리를 동맹의 수도인 하이네센으로 소환시키는 전략을 세운다.
양 웬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제국은 전격적인 침략을 시작한다. 지휘관이 없는 이제르론 요새는 위기가 맞았으나, 가까스로 돌아온 양 웬리는 기가막힌 전술로 방어해 낸다.결국 제국군은 켐프 장군과 가이에스부르크 요새를 잃고 비참하게 후퇴한다.
8) 쌍두의 뱀 작전과 최후의 전투 (버밀리언 회전)
라인하르트는 난공불락인 이제르론을 우회하여, 중립국이었던 페잔 회랑을 전격 침공·점령하는 '쌍두의 뱀(라그나로크) 작전'을 펼친다. 로이엔탈에게 이제르론을 공략하는 척하게 하고, 본인과 미터마이어의 본대는 페잔을 점령해 버린다.허를 찔린 동맹은 무너져 내리고, 양 웬리는 전략적 가치가 사라져 버린 이제르론 요새를 포기하고 라인하르트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서 함대를 이끌고 '버밀리언 성계'로 다가간다.
그 사이 라인하르트의 대규모 함대는 동맹의 명장 뷰코크가 이끄는 초라한 마지막 함대를 궤멸시키고 항복을 권유한다. 하지만 뷰코크는 "민주주의란 대등한 친구를 만드는 사상이지, 주종관계를 성립시키는 사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끝까지 항전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버밀리언 성계에 도착한 양 웬리의 기가 막힌 전술로 라인하르트는 본진이 유린당하며 죽음 직전까지 몰린다. 즉, '전투'에서는 양 웬리가 완승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제국의 미터마이어와 로이엔탈 함대가 동맹의 수도 하이네센을 포위하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면서 동맹 정부는 양 웬리에게 즉각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린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민주주의자였던 양 웬리는 다 잡은 라인하르트를 살려주고 검을 거둔다. 결론적으로 '전쟁'에서는 라인하르트가 승리하여 은하 연방을 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새로운 로엔그람 왕조의 시작이다.
9) 로이엔탈의 반란과 이제르론 요새 재점령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제국 통일의 일등공신이자 구 동맹령의 총독이 된 쌍벽 중 한 명이었던 오스카 폰 로이엔탈이 사이비 종교 집단 지구교의 음모와 라인하르트 황제에 대한 오만함이 맞물려 라인하르트의 암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는 결국 반란으로 이어진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질풍 늑대' 볼프강 미터마이어가 출진하고, 비극적인 싸움 끝에 로이엔탈은 최후를 맞이한다.
이 내부 혼란을 틈타, 은퇴 후 동맹 정부의 감시와 암살 위협을 피해 탈출한 양 웬리는 게릴라전을 펼쳐 제국군이 지키고 있던 이제르론 요새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10) 양 웬리의 허무한 죽음과 율리안의 승계
양 웬리의 끈질긴 저항과 신념을 인정한 황제 라인하르트는 그와 대등한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회담을 제안한다. 양 웬리는 평화의 희망을 품고 회담장으로 향하지만, 은하계의 혼란을 획책하던 '지구교' 암살자들의 기습을 받아 허벅지 동맥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고 만다. 우주를 호령하던 불패의 지략가는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전쟁터가 아닌 함선 복도에서 피를 흘리며 허무하게 숨을 거둔다.
여기서 작가는 절대 권력을 꿈꾸는 전제군주뿐만 아니라, 종교라는 대의명분 뒤에 숨어 권력을 탐하고 눈을 가리는 '지구교' 같은 집단이 인류를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도 함께 경고하고 있다.
양 웬리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의 아내였던 프레데리카가 선거를 통해 이제르론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양웬리의 양아들이자 제자인 율리안 민츠가 이제르론 요새의 지휘권을 이어받아 민주주의의 마지막 불꽃을 지킨다.
11) 라인하르트의 죽음
라인하르트는 그의 비서 역할을 하던 히르데가르트 폰 마리엔도르프(힐다)와 결혼도 하고 아들도 얻는다. 하지만 숙적이자 유일하게 자신과 대등했던 양 웬리가 사라지자, 라인하르트의 삶의 목적도 급격히 빛을 잃는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불꽃처럼 태우며 얻은 희귀 난치병으로 인해 라인하르트의 육체는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마지막으로 율리안이 이끄는 이제르론 군과의 전투를 치른 후, 라인하르트는 이제르론 요새를 제국에 넘기는 대신에 은하계에 '입헌군주제(민주주의적 요소가 결합된 형태)'를 도입해달라는 율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25세라는 너무도 젊은 나이에 "우주를 손에 넣었으나, 친구도 숙적도 없는" 쓸쓸한 침대 위에서, 먼저 간 키리히아이스와 양 웬리의 뒤를 따르듯 조용히 눈을 감는다. 은하계를 수놓았던 거대한 영웅들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두 영웅의 철학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라인하르트보다는 양웬리를 더 좋아한다. 라인하르트는 숱한 고비를 넘기고 성장하여 권력을 잡는다. 그는 그 권력과 수많은 유능한 수하들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양웬리와 대적한다. 이에 반해 양웬리의 수하 중 라인하르트의 수하에 비견될만한 사람은 아텐보로나 피셔 정도로 고작 두어 명에 불과하다. 더욱이 동맹 정부는 무능하여 그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려 하고 어떤 싸움이던 무조건 이기는 라인하르트의 상승보다는, 싸우려 하지 않고 지는 싸움은 시작하지도 않는 하지만 싸우면 지지 않는 불패의 양웬리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라인하르트의 통치 철학에는 몇가지가 있다.
첫째, 공정성을 중요시한다. 그는 문벌 귀족 중심의 부패한 골덴바움 왕조를 증오한다. 출신, 혈통, 연줄이 아니라 오직 능력으로 인재를 등용한다.
둘째, 국가는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민주주의의 중우정치(衆愚政治)와 귀족의 파벌 싸움을 극도로 경멸한다. 빠르고 과감한 결단이 가능한 전제정치야말로 이상적인 체제라고 믿는다.
셋째, “은하를 하나로 통일하여 전쟁을 끝낸다.”는 신념이 있다. 이는 단순한 정복욕이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통일이다. 그는 분열된 상태야말로 전쟁을 영속시키는 원인이라고 본다.
넷째, “지도자는 국민 앞에 직접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직접 전선에 나가 싸우고, 행정과 군사 모두를 장악한다. 라인하르트에게 지도자는 국민을 이끄는 주인이자 보호자이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통치 철학의 가장 큰 약점은 지속 가능성의 부재이다. 라인하르트 본인은 위대했지만, 그의 후계자가 그와 같은 능력과 덕성을 가질 보장은 없다. 결국 양웬리의 죽음과 율리안과의 대면 후,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철학에 한계를 인정하고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며, 완전한 전제정치가 아닌,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체제를 허용한다. 이는 그의 철학이 완전한 독재를 추구하다가 현실 앞에서 타협한 결과이다.
양웬리의 민주주의 철학은 이와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첫째, 그는 최악의 민주주의라도 최선의 전제정치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철학적 축 중 하나이다. 그는 라인하르트의 천재성과 제국의 효율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책임성과 자유를 더 높은 가치로 둔다.
둘째, 전제정치의 장점과 단점을 안다. “현실적으로 전제정치가 개혁을 빠르게 추진할 수 있다”, “라인하르트 같은 위대한 지도자 아래에서는 민중이 더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후계자가 그와 같은 인물이라는 보장이 없다.” “무능하거나 폭군인 군주가 나오면 국민은 그를 합법적으로 바꿀 방법이 없다.”라는 말도 남긴다.
셋째,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부패하기 쉽지만, 국민이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름을 강조한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도 국민 스스로가 짊어진다. 책임 소재가 분명하다.
넷째,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임받는 것임을 믿는다. 그는 동맹의 군사 쿠데타를 진압하고 자신을 시기하는 무능한 동맹정부를 다시 복귀시킨다.사실상 유일무이한 군사력을 가졌지만 그냥 평범한 군인으로 돌아간다. 또한 라인하르트를 죽이고 자신이 은하를 통일할 수도 있었지만, 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무능한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다.
다섯째, “완벽한 체제는 없다. 다만 더 나은 쪽을 선택할 뿐”라는 현실주의다.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지만,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불완전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내심 라인하르트보다는 양웬리를 더 주인공으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건 내가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라인하르트는 전제정치의 유능한 엘리트 관료 집단의 효율성으로 상승을 지켜온 반면, 양웬리는 민주주의의 무능한 정치인과 관료라는 시스템의 한계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불패를 지킨다.
내가 기억하는 명 대사(기억을 쥐어 짜내서)
양웬리는 자주 철학적인 말을 던진다.
"전쟁을 시작할 때는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지만, 전쟁을 끝낼 때는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말하며 끝낸다. 언제나 그렇다."
지구의 역사는 사실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명분은 가지가지다. 하지만, 전쟁의 참혹함은 결국 안타까운 생명의 소진이다. 마치 지구의 인구 과밀을 막으려고 합의한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
결국 작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가나 선동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국가, 민족, 대의명분 같은 '인간보다 더 거대해 보이는 무언가'를 들이대며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수많은 목숨을 잃고 난 뒤 전쟁을 끝낼 때는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라는 말로 마무리를 짓는다.
양웬리는 항복한 후에 라인하르트를 독대하면서 이런 대화를 했다.
라인하르트: "만약 그대가 처음부터 내 밑에 있었다면, 나와 그대는 우주를 무대로 얼마나 멋진 일을 해낼 수 있었겠는가.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는가?"
양 웬리: "폐하, 제가 만약 제국에서 태어났다면 부르시지 않았어도 폐하의 깃발 아래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저는 민주주의라는 물을 먹고 자란 인간입니다. 민주주의자에게는 복종해야 할 전제군주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라인하르트: "민주주의가 그렇게나 좋은 것인가? 그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동맹의 민주주의는 결국 그대를 시기하고 이용하며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나?"
양 웬리: "그렇습니다. 전제정치의 장점은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가 신속하게 사회의 병폐를 개혁할 수 있다는 점이겠지요. 폐하는 진정 위대하고 좋은 지도자이십니다. 스스로 뒤에 숨지 않고 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셨으니까요."
라인하르트: “그것만큼은 인정해주는군”
양 웬리: "하지만, 폐하의 후손이나 차기 독재자가 폐하처럼 현명하고 좋은 분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제정치에서는 무능한 군주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지도자를 바꿀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전제정치보다 비효율적이고 부패할지언정, 지도자가 무능하고 부패했을 때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합법적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스스로 책임질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제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이유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작가가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철인정치와 민주주의
플라톤이 말한 완벽한 철인 정치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인간인 이상, 절대 권력 앞에서는 반드시 부패하거나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작가가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를 빌려 전하고자 했던 이 날카로운 통찰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가장 신성해야 할 종교의 영역, 즉 '현대의 교회' 모습 위로 그대로 겹쳐진다.
너무나도 신실했던 목사님이 교회가 성장하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본다. '주님의 뜻이 옳다'에서 '내가 옳다'로 중심이 이동하고, 교회를 마치 사유물처럼 여기는 독재적 권력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은하제국의 문벌 귀족이나 황제의 권력 세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독자가, 현대 교회의 세습과 권력 투쟁 속에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를 인정하기에 교회 내부에서도 '교회 민주화'와 '권력 분립'의 목소리는 늘 시끄럽고 치열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기독교를 호칭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주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보혈로 세우신 교회가, 양웬리가 그토록 경멸했던 '시스템 뒤에 숨은 무능한 선동가들'이나 '지구교' 같은 권력 집단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 같아 그저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할 뿐이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않다. 지금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훨씬 더 많다. 그렇기에 그나마 우리 사회가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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