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박사 목회자가 이단이 되는 법 - 닫힌 시스템과 열린 신앙
세상은 흔히 과학과 종교를 물과 기름처럼 본다. 엄밀한 실증을 추구하는 공학박사가 종교에 심취할 때, 대중은 그가 아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신앙의 길을 걸으리라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종교 현상학과 심리학에는 ‘엔지니어 증후군(The Engineer Syndrome)’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존재한다. 정답은 오직 하나여야 하며, 오차와 결함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공학적 강박이 종교적 도그마와 만날 때, 인문학자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파괴적인 교조주의가 탄생한다는 법칙이다.
한 명의 기계공학자가 짜놓은 완벽한 성벽
이번에 이단 시비가 걸린 그분의 행보는 그 전형적인 사례다. 기계공학과 교수 출신이자 미국의 극단적 근본주의 성향 독립침례교회에서 신학을 독학한 그는, 성경을 대할 때도 ‘오차 없는 기계적 매뉴얼’의 직관을 투사했다. 모태 감리교 출신이었던 그는 한국 교회의 주류인 장로교의 칼빈주의 예정론을 격렬히 거부하는 반작용을 겪으며, 1611년 번역된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만이 하나님이 무오하게 보존하신 유일한 성경이라는 극단적인 ‘역본 유일주의’에 정착했다.
그의 공학적 매뉴얼식 사고는 창세기 6장의 ‘네피림’ 해석에서 절정을 이룬다. 텍스트 이면의 은유를 거부하는 그는 타락한 천사와 인간 여성이 성적으로 결합하여 유전자가 오염된 거인족(네피림)이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인류의 타락과 구속사를 영적 전인성의 문제가 아닌, ‘생물학적 유전자 오염과 혈통 보존’이라는 시스템적 프레임으로 치환해 버린 것이다.
정통의 반격: 비본질의 본질화가 부른 격리
정통 기독교단들이 그를 ‘참여 금지’ 혹은 ‘이단성’으로 규정하고 정죄한 이유는 단순한 번역본의 선호도 차이가 아니었다. 기독교 신학의 근간인 ‘성경관’을 송두리째 흔들었기 때문이다. 정통 신학은 성경의 ‘원본’만이 무오하며 번역본은 이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보지만, 그는 특정 번역본에 절대적 무오성을 부여하는 ‘이중 영감설’의 오류를 범했다.
더 큰 문제는 대다수 성도가 읽는 개역성경을 ‘사탄이 변개한 불량품’으로 규정함으로써 교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성도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며 교회를 분열시켰다는 점이다. ‘확신’이라는 강렬한 도파민이 뇌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그것을 깨달음이라 믿고 밀어붙였을 것이다. 외부의 비난과 기성 교단의 정죄가 거세질수록, "진리는 언제나 박해를 받는다"는 ‘박해 콤플렉스’의 자가발전 회로를 돌리며 그 성벽을 더욱 공고히 쌓아 올렸으리라.
기계공학과 재료공학: 닫힌 시스템과 열린 불확실성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똑같이 공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이 왜 종교와 세상을 바라볼 때 이토록 극과 극으로 갈라지는가? 그 비밀은 공학의 세부 전공이 주는 직관의 차이에 있을지 모른다.
기계공학은 엄밀하게 통제된 ‘닫힌 시스템’을 지향한다. 입력값이 정확하면 출력값도 완벽하게 예측 가능해야 하며, 설계도대로 조립되지 않은 기계는 불량품이다. 성경을 이 닫힌 설계도로 인식할 때 100% 결함 제로(Zero-Defect)의 텍스트를 찾아 헤매는 것은 그들에게는 오히려 가장 논리적인 전개가 되기 쉽다.
그러나 재료나 물성을 다루는 재료공학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미시 세계의 불확실성, 결함(Defect)의 필연적인 공존, 환경에 따른 유기적 변화를 늘 마주한다. 덕분에, 재료공학자들에게 우주는 기계적 톱니바퀴가 아니라 확률과 신비로 가득 찬 열린 공간으로 이해하는데 유리하다.
현대 물리학의 정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측정과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 겸손’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준 데 있다. 예를 들어서 양자 세계에서 시간은 한 방향만을 흐르지 않는다. (실제로 루비듐 원자에 광자를 조사해서 음의 시간이 측정되었다. 반대로 흐르는 시간 - 양자역학과 신학 ) 따라서 과학을 더 깊이 파고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 알 수 없다"는 겸손한 고백에 도달한다. 외부의 비난이나 반론(에러 메시지)이 들어오면 내 주장과 시뮬레이션을 다시 돌아보고 변수를 수정하는 ‘열린 피드백 루프’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예상되는 질문과 나의 답변
Q1-1: 재료공학 박사이신 것 같은데, 과학의 기본을 모르는 소리는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법칙과 상수를 오차 없이 완벽하게 설계하셨듯이, 구원의 매뉴얼인 성경도 오차율 0%로 보존하시는 것이 당연하다. 확률과 불확실성을 신앙에 들이미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모독하는 '타협주의 진화론자'들의 물타기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불량률 0%의 완벽한 순수 물질이고, 개역성경은 변개된 불순물(Defect)이 섞인 기계이다. 우리는 기계적 닫힌 시스템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벽한 설계도를 수호하는 것이다.
A1-1: 질문은 법칙과 상수가 완벽한 것과, 그것을 담는 '언어와 역사'라는 매질(Medium)의 특성을 오해하고 있다. 아무리 완벽한 순도를 지향해도 결정 내에 엔트로피적 결함(Thermodynamic Defect)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물질이 고유의 물성과 유연성을 갖듯, 하나님은 시공간이라는 제한된 매질 속에 자신의 말씀을 담으셨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1611년의 근대 영어라는 '언어의 격자 구조'는 끊임없이 변하는 유기적 시스템이다. 특정 시대의 특정 번역본만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특정 온도에서만 존재하는 상(Phase)이 물질의 유일한 본질'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참된 전능성은 닫힌 텍스트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와 번역의 변수 속에서도 구원의 본질을 흐르지 않게 하시는 열린 섭리에 있다.
Q1-2: 창세기 6장의 네피림과 유전자 오염을 은유로 치환하면 안 된다.노아의 홍수 전 인류의 혈통 오염은 생물학적 사실이다. 현대 유전공학에서도 이종 간의 결합과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로 DNA를 편집하는 시대인데, 천사와 인간의 유전자 결합을 신화로 치환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을 믿는 공학박사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완벽한 팩트 릴레이션이다.
A1-2: 유전공학의 메커니즘을 영적 존재에게 기계적으로 투사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이다. 구속사를 'DNA 염기서열 보존 게임'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영적 전인성과 죄의 본질을 물질주의로 격하시키는 행위이다. 인류의 타락은 유전자 분자 구조의 에러가 아니라, 창조주와의 관계성 단절이라는 영적 불연속성의 문제이다. 텍스트의 행간과 신학적 내러티브를 읽지 못하고 오직 '생물학적 하드웨어 오염'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교향곡의 악보를 보고 '탄소 성분의 먹물과 펄프의 결합체'로만 정의하는 기술자의 맹점과 다를 바 없다."
Q2-1: 칼빈주의 예정론이나 교리를 '비본질의 성벽' 취하하며 성공회나 기장 측의 유연성을 찬양한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리는 교회를 지키는 단단한 뼈대이다. 양자역학이니 확률이니 하는 현대 과학의 불확실성을 신학에 대입하여 교리의 절대성을 흔드는 것은, 결국 종교다원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으로 가는 위험한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신학은 유기적으로 변하는 재료가 아니라, 영원불변한 반석이다.
A2-1: 교리가 교회를 수호하는 소중한 뼈대(Structure)라는 점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재료공학에서도 구조적 강도(Strength)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강도만 높고 유연성(Ductility)이 없는 물질은 외부에서 작은 충격이나 새로운 변수가 가해질 때 흡수하지 못하고 한순간에 유리처럼 깨져버리는 '취성 파괴(Brittle Fracture)'를 겪게 된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의 신비—예를 들어 루비듐 원자 실험을 통해 정보와 시간의 흐름이 우리가 아는 선형적 흐름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양자 세계의 경이—는 하나님의 창조 영역이 우리가 만든 17세기 교리적 프레임보다 훨씬 광대함을 웅변한다. 과학적 발견이라는 피드백 루프를 거부한 채 자신들의 신학적 시스템만 '닫힌 계(Closed System)'로 유지하려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무한성을 인간의 이성적 도그마 안에 가두려는 또 다른 형태의 엔지니어 증후군일 수 있다.
Q2-1: 본질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자유에 맡기면, 어디까지가 본질이고 어디까지가 비본질인지 기준이 모호해진다. 기독교 신학에서 양보할 수 있는 '비본질'이란 엄격히 제한되어야 합니다. 과학의 눈으로 신학의 여백을 넓히다 보면 결국 기적도, 동정녀 탄생도, 부활도 다 '유연한 해석'의 영역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A2-1: 본질의 수를 줄인다는 것은 신앙의 밀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핵심적인 핵(Nucleus)에 전 무게중심을 두는 일이다. 모든 교단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들 -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 을 본질로 삼으면 많은 문제가 사라진다. 본질이라는 결정(Crystal)이 너무도 단단하고 분명하다면, 그 외 주변부의 해석적 여백은 우주의 크기만큼 넓어져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해석의 차이, 역사적 텍스트의 자구 하나하나를 다 본질의 상자 안에 쑤셔 넣으려다 보니 상자가 터져 교회가 수백 개로 분열되는 것이다. 2000년 전의 고대 천동설적 우주관에 갇혀 현대의 우주론과 양자역학을 사탄의 학문이라 밀어내는 닫힌 신앙보다, 현대 물리학이 증명한 한계령 앞에서의 '지적 겸손'을 품고 창조주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열린 신앙이 훨씬 더 견고하다. 참된 신앙의 담대함은 성벽을 높이 쌓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문 밖의 무한한 진리의 바다를 향해 돛을 펼치는 데서 온다.
본질의 사수와 여백의 자유
의외로 많은 목회자들이 구원에 직결되지 않는 비본질적인 영역(아디아포라 Adiaphora)의 상당수를 본질의 상자 안에 집어넣고 성벽을 쌓는다. 주류 장로교 역시 교리를 중시하느라 비본질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일부 존재하지만, 성공회나 기장 교단처럼 본질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해석의 자유로 열어두는 유연한 신앙도 존재한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본질의 수를 줄인다는 것은 결코 신앙의 순도가 흐려짐을 뜻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성육신 하시고,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우주의 멸망이 있으며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
이러한 가장 단단하고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본질들만 가슴에 품고, 나머지는 창조주가 인간에게 선물한 이성과 탐구의 영역으로 해방하는 용기다.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도 있는 양자 세계의 경이로움을 보며 창조주의 무한한 섭리에 감탄할 수 있는 유연함, 내가 짜놓은 작은 교리의 성벽이 무너질까 봐 눈을 감아버리지 않는 담대함. 본질은 단단히 사수하되 비본질의 영역에서는 과학적 사실과 사고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외연을 넓혀갈 때, 우리의 신앙은 부러지지 않고 우주의 크기만큼 넓어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다 알 수 없는 무한함 앞에 서는 피조물의 가장 합리적이고도 아름다운 예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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