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신앙/신앙 사색

하나님과의 동기화 – 인간의 마음은 다차원 벡터

캐나다 제이슨 2026. 6. 11. 04:18

하나님과의 동기화 인간의 마음은 다차원 벡터

 

주말 아침,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인간의 마음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색에 잠겨 본다. 수많은 심리학 이론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인간의 심리를 가장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결국매우 복잡한 다차원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마음은 다차원 벡터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선형적인 자나 평면 위에 올려두고 단정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이의 행위를 A라는 관점에서 보면 5점이지만, B라는 관점에서는 3점이고, C라는 관점에서는 7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명확히 분류할 수 있는 거시적인 관점만 해도 수십 개가 넘을 것이고,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미묘한 맥락까지 포함한다면 그 차원은 수만 개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인간의 심리는 고차원 공간 속에서 요동하는 정밀한 벡터(Vector)와도 같다.

 

물론 인간의 마음은 이토록 다차원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편향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내가 서 있는 축에만 높은 가중치를 두고, 다른 축은 쉽게 과소평가해 버린다.

 

이 다차원적 현실과 편향성은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과 평가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법적으로 접근이 금지된 외딴섬에 주민들을 전도하겠다며 목숨을 걸고 잠입한 한 선교사의 열정이 그렇다. 전통적인 신앙의 축에서 보면 이는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순교자적 헌신이다. 하지만 인류학적, 생물학적 축에서 보면 문명과 격리된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옮겨 부족을 전멸시킬 수도 있는 무모하고 위험한 행위가 된다.

 

만약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부족의 언어를 치열하게 연구한 뒤, 센서와 드론 기술을 활용해 공중에서 성경 말씀을 들려주는 스피커를 투하하는 방식을 선택한다면 어떨까? 합리성과 안전의 축에서는 최고의 점수를 받겠지만, 피와 눈물이 없는 차가운 기술 만능주의라는 또 다른 축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100% 순수한 동기'라는 것마저도 결국 수많은 차원 중 단 하나의 축에서 매겨진 점수일 뿐, 다른 축의 결과나 책임을 상쇄해주지는 못한다.

 

과거 호주의 한 유명 프로 운동선수가 쓰나미라는 대재앙을 맞이한 인도네시아 현장으로 직접 가서 돕고자 했을 때, 그가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은 그를 만류했다. 현장에 필요한 것은 당신 한 사람의 미숙한 노동력이 아니라 거대한 물질이니, 경기장에서 열심히 뛰어 번 돈으로 후원하라는 권고였다. 이성적 효율성의 축에서는 후원이 정답에 가깝지만, 인간의 심리는 묘하게도 직접 가서 땀을 흘려야 무언가 한 것 같고 거액을 송금하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찝찝함을 느낀다. 인간의 뇌는 자신이 직접 투입한 에너지와 눈앞의 피드백이 직관적으로 연결될 때만 만족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방향의 정렬

 

그러나 이 모든 모순과 복잡함을 단번에 꿰뚫는 오랜 통찰이 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의 비유이다. 온몸이 다 눈일 수 없고, 온몸이 다 귀일 수 없다. 손은 손의 자리에서, 발은 발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분량대로 시스템을 최적화하는 것이 몸 전체를 위한 최선이다. 타인의 방식이 더 영웅적이고 순수해 보인다고 해서 나의 자리를 폄하할 필요가 없다.

 

결국 외딴섬으로 걸어 들어간 청년의 뜨거운 신념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고, 후방에서 냉철하게 물질과 기술로 돕는 이들의 방식을 폄하할 수도 없다. 이 다차원 방정식에서 정작 경계해야 할 좌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흠결만 찾아내어 비평하는 방관자의 삶이다.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인 결론은 결국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소박한 진리다. 몸이 약하고 물질이 부족할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늘 있기 마련이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원의 총량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중심을 다해 내뿜는 순수한 출력값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차원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 중심의 지향점과 목적지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지도 모른다. 각자의 자리에서 나다운 출력을 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복잡한 다차원 우주를 살아가는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형태가 아닐까 싶다.

 

합리화를 피해야 하는 이유

 

다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핑계로 최소한의 노력만을 남긴 채 삶을 합리화하는 게으름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나의 경우 돈이 없고 글을 잘 쓴다는 환경은'기본값'일뿐,누군가의 마음을 돌이키는 영적 전쟁터에서는 내가 가장 약한 부분인 물질을 깨뜨려 헌신할 때 비로소 상대방의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마음의 다차원 축이고, 주력 축이 있다. 하지만 어느 한 축만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히 다가가는 것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고, 그 것이 예수님이 가장 잘하실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평범한 삶을 30년간 사시다가, 3년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이 질문은 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인간의 축을 사셨다. 결국 진정한 마음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축에서 노력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내가 잘 할 수 없는 다른 축에서도 노력하는 삶은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어쩌면 그 것이 성령의 열매가 하나가 아니라 9가지로 표현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과의 동기화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정말로 애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동기화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진멸하는 데 누구보다 열정적인 벡터를 그렸던 사람이다. 본인은 그것이 하나님 축의 10점 만점짜리 삶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외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고 걸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하나님을 향해 똑바로 걷고 있다고 믿는 안타까운 현실이 존재한다. 그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낸 축이 애초에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음에도, 스스로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한 끝에 그 왜곡된 축을 기준으로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그 빗나간 열심의 결과는 열매 없는 삶으로 끝나고 만다. 심지어는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막아서는 무서운 삶을 살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결정과 노력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맞닿아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그러한 영적 성찰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에 온 열정을 바쳐 충성하는 비극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발자국을 돌이켜봐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이 하나님의 발자국과 같은 방향인지도 봐야 한다.나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면, 아마도 그 발자국은 같은 방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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