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신앙/신앙 사색

사라지는 교회 - 22세기에도 교회는 존재할까?

캐나다 제이슨 2026. 5. 24. 10:03

사라지는 교회 - 22세기에도 교회는 존재할까?
 
기독교 신학은 오랫동안 칸트와 헤겔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칸트는 신앙을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었고, 헤겔은 역사 변증법 안에 흡수했다. 문제는 단순히 이 두 프레임이 19세기의 산물이라는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이 프레임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실 대중이 무의식적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자신도 모르게 단순하고 확실한 세계관을 원한다. 6일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반박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교회는 그것을 고수한다. 신학적 확신 때문이라고 믿지만, 그 안에는 ‘수요’라는 두 글자가 숨어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회와 기독교장로회처럼 과학과의 대화를 진지하게 시도하는 교단이 진실에 더 가깝지만, 대중은 원하지 않는다. 시장 논리가 교리를 지키는 것이다. 더욱이 기존 교회를 떠나는 신도들은 그런 교단이 존재하지는 것도 잘 모르기에 이동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과 수학은 대중의 욕망에 반응하지 않는다. 지구는 대중이 원한다고 우주의 중심이 되지는 않는다. 기술은 대중의 영향을 받지만, 진리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학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중이 원하는 바를 바탕으로 끌려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 위안의 생산이 된다.
 
기술적 임계점 앞에서
 
지금 인류는 전례 없는 기술적 임계점을 향해 가속하고 있다. 육체를 입은 AI, 로봇이 대체하는 노동, 로봇세 기반의 기본소득 - 이것은 먼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방향은 이미 정해졌고, 속도만 남은 문제다. 문제는 가속도가 붙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임계점을 넘는 순간,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재편된다. 노동의 의미가 사라지고, 성취의 사다리가 꺾이고,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문명 전체를 향해 던져진다.
 
그 때 교회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여전히 칸트와 헤겔의 언어로, 여전히 직관이 허락하는 가장 가까운 봉우리를 이벤트 허라이즌(event horizon)이라고 부르며 서 있을 것인가. 과학적 사실조차 거짓말이라고 계속 주장할 것인가?
 
과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이벤트 허라이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봉우리 하나였음이 드러난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더 먼 곳에 진짜 지평선이 보인다. 몇 개의 봉우리를 더 넘더라도 진정한 이벤트 허라이즌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지평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오랫동안 가장 가까운 봉우리를 지평선으로 설정해놓았다. 과학이 그 봉우리를 넘을 때마다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이것은 과학의 오만이 아니라 신학의 오류다.
 
진정한 이벤트 허라이즌
 
진정한 이벤트 허라이즌, 인간의 인식이 원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경계는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 선명하게 그 윤곽을 드러낸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수학 안에서 수학의 한계를 증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듯, 우주의 사건 지평선 너머를 물리학이 기술할 수 없듯, 인간 이성의 끝에는 원리적 침묵의 영역이 존재한다. 신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봉우리를 지평선이라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평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정직하게 증언하는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한 후에 교회가 바뀌면 이미 늦다. 임계점을 넘은 세상에서는 지금 수준의 교인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노동과 성취의 언어로 신앙을 설명하던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고, 6일 창조의 단순함에서 위안을 찾던 대중은 더 강렬한 도파민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 때 교회에 남는 것은 극소수의 신자뿐이다.
 
변화는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칸트와 헤겔의 언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체계라도 그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괴델의 논리를 인정하고 현대 과학의 언어로 신앙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과학의 진보가 신앙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지평선의 윤곽을 더 정밀하게 그려준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가 존속하는 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통에 길들여져 있는 대중의 입맛에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여기는 당신의 지적·영적 근육을 단련하는 곳이다.”라고 선언하며 깊은 사색, 즉 모든 지식을 총동원한 깊은 말씀 묵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 것이 진리다”라는 신학적 오만을 벗어나서 끊임 없이 진리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초월성이 머무는 자리를 현대 과학의 언어로 변증해야 한다. 그것이 임계점 이후의 세상에서도 교회가 살아남아서 필요한 목소리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
 
'숏폼'과 '패스트푸드'에 중독된 대중은 복잡한 사색을 거부한다. 교회마저 이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사색 없는 확신만을 제공한다면, 기술의 발달은 결국 그들에게 ‘의심’을 던져줄 것이고, 더 자극적인 사이다를 제공하는 AI 플랫폼에 의존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질문과 대답
 
Q: 교회가 대중의 입맛(6일 창조론, 단순한 위안)에 맞춰 '시장 논리'로 교리를 지킨다고 비판했지만, 목회 현장은 '지적 토론장'이 아니라 '생존과 치유의 공간'이다. 일주일에 지친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복잡한 현대 과학 언어나 괴델의 정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6일 동안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듯 당신의 삶을 돌보신다"는 단순하고 명확한 위안이다. 이를 '확신을 파는 시장 논리'로 폄하하는 것은 양들을 먹이는 목회의 본질을 오해한 엘리트주의적 시각이다.
 
A: 교회는 진실을 선포하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 교회가 주는 위안은 진실이라기 보다는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사색 없는 확신’일 뿐이다. 임계점을 넘은 미래(노동이 사라지고 AI가 삶을 대체하는 시대)에 성도들이 마주할 절망은 "오늘 하루 힘들었다" 수준이 아니라,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문명사적 실존 위기일 것이다. 그때도 "6일 창조를 믿으면 진짜 믿음이다"와 같은 언어로 영혼을 돌볼 수 있을까? 진짜 영혼 돌봄은 성도들을 지적 영아(嬰兒) 상태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거대한 허무와 의심의 파도에 맞설 수 있도록 지적·영적 근육을 단련시켜 주는 것이니다.
 
Q: 신학이 칸트와 헤겔의 언어에 갇혀 있다는 지적은 일리 있으나, 교회가 수천 년간 지켜온 전통과 교리는 대중의 입맛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초월적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과학과 수학이 대중의 욕망에 반응하지 않듯, 하나님의 진리 역시 시대의 과학 사조에 반응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의 언어로 신앙을 변증하라는 주장은, 자칫 변하는 과학적 가설에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뜯어 맞추라는 '주객전도'가 될 위험이 크다. 과학은 피조세계를 이해하는 도구일 뿐, 신앙의 영토를 규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A: 이것은 주객전도가 아니라 '도구의 현대화'이다. 교회가 수천 년간 붙들고 있는 칸트와 헤겔 역시 당대의 세속 철학이자 도구였다. 왜 19세기의 철학적 그릇은 절대시하면서, 21세기의 과학적 사실은 거부하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만약 지금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한다면 그 것은 계시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오류일 뿐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수학의 한계를 증명했듯, 현대 과학은 발달할수록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원리적 침묵의 영역(초월의 자리)"을 오히려 정교하게 증명해 준다. 과학의 언어를 품는 것은 계시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성을 가장 현대적이고 정직하게 변증하는 길이다.
 
Q: 글의 결론에서 교회가 "지적·영적 근육을 단련하는 깊은 사색의 세계"로 초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지적 훈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다. 교회를 사색과 신학적 탐구의 공간으로만 정의한다면, 지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하루하루의 노동이 버거운 소외된 대중은 교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오히려 22세기의 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복잡한 과학적 변증'이 아니라, 기술 소외 계층을 품는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A: 여기서 말하는 '깊은 사색'은 학문적 유희가 아니라, "모든 지식을 총동원한 깊은 말씀 묵상"이자 AI 시대에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영적 투쟁이다. 미래의 대중은 지금보다 더욱 심하게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AI 플랫폼이 주는 도파민과 자극적인 사이다에 중독될 것이다. 교회가 이 흐름에 편승해 똑같이 복잡한 사색을 거부하고 쉬운 감정적 위안만 준다면, 결국 성도들을 AI 플랫폼에 빼앗기게 된다. 교회가 "여기는 당신의 지적·영적 근육을 단련하는 곳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중독된 세상으로부터 인간을 인간답게 건져내는 가장 강력한 목회적 대안이다.
 
Q: 성공회나 기독교장로회(기장)처럼 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교단으로 이동이 없는 이유를 단순히 "대중이 진실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비약이다. 성도들이 교단을 선택하거나 이동할 때는 신학적 정체성 외에도 예배 분위기, 공동체의 유대감, 자녀 교육 환경, 설교의 영성 등 수많은 목회적 요소가 작용한다. 과학과의 대화를 잘한다고 해서 교인이 늘지 않는 것을 '대중의 무지나 욕망' 탓으로 돌리는 것은 현장 감각이 결여된 분석이다.
 
A:  지금 당장 과학과 대화하는 교단으로 이동이 없는 이유는, 아직 대중이 전통에 길들여진 관성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논리가 작동하여 익숙하고 편안한 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하면, 성도들이 삶에 근본적인 '의심'을 던지게 되고, 예배의 감동, 공동체 유대, 자녀 교육의 안정감과 같은 목회적 요소들로 지탱되던 기존 대형 교회들의 둑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지금 교회의 현실은 다가오는 해일을 보지 못하고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과도 같다. 그 신뢰의 토대 자체가 무너지면, 그 때에도 살아서 기독교를 유지하는 교단은 여전히 둑이 건재한 성공회나 기장이 될 것이다.
 
Q: '이것이 진리다'라는 신학적 오만을 벗어나라"고 했는데, 기독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포 위에 세워진 종교다. 확신(Certainty)이 사라진 강단, "우리는 진짜 지평선을 향해 갈 뿐 정답은 모른다"고 말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어느 성도가 인생을 걸고 헌신하겠는가? 안 그래도 불확실한 세상에서 교회마저 불확실성을 선포한다면, 성도들은 AI 플랫폼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교회를 떠날 것이다. 선포(Kerygma)를 포기한 신학은 더 이상 교회를 지탱할 수 없다.
 
A: "이것이 진리다"라고 폐쇄적인 성벽을 치는 신학적 오만이야말로 오히려 작은 과학적 발견에도 신앙 전체가 흔들리게 만드는 주범이다. 가장 가까운 봉우리를 지평선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과학이 그 봉우리를 넘을 때마다 성도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떠나는 것이다. 복음의 확실성은 '닫힌 영토'를 사수하는 파수꾼의 집착이 아니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순례자의 확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저 지평선 너머에도 살아 계신다"는 정직한 선포가, 다가올 회의주의 시대에 오히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진짜 확신이 될 것이다.
 
결론 – 진짜 성소로의 초대
 
이미 한국 교회의 청장년층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주일학교는 텅 비어가고 있다. 지금의 교회의 주류인 노인 세대가 다 떠나고 나면, 한국 교회 역시 유럽처럼 텅 비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것을 막는 길은, 현재의 주류 교회의 성경 해석이 바뀌는 길밖에는 없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창조주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의 기본 자세는 겸손으로 진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늦기 전에, 본질을 사수하되, 문자주의에서 벗어나 과학적 사실도 포함하여 더 나은 성경 해석을 내어 놓아야 한다.
 
과학의 진보는 신앙의 영토를 뺏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머물러야 할 진짜 성소(Sanctuary)를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봉우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아니라, 끝없는 지평선을 향해 걷는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청년들은 계속 떠나는데, 왜 교회는 안 변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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