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신앙/신앙 사색

아이작 아시모프 『최후의 질문』이 기독교에 던지는 도전

캐나다 제이슨 2026. 5. 17. 11:43

아이작 아시모프 『최후의 질문』이 기독교에 던지는 도전 

 

아이작 아시모프는(Isaac Asimov)는 구소련 출신의 미국의 SF 소설가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심지어 유명한 무신론자였지만 성경을 종교적 교리를 떠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맥락에서 성경을 해설한 방대한 교양 역사서로 푼 아시모프의 바이블 안내(Asimov's Guide to the Bible)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글쓰는 기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글쓰기 대신 미국 대통령이 되라고 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주의 끝에서 날아온 도전장

 

그 중 단편 『최후의 질문』은 경이로운 소설이다. 인류가 만든 슈퍼컴퓨터 'AC(Automatic Computer)'에게 던지는 반복된 질문으로 시작된다.

 

"에너지가 고갈되고 우주가 종말을 맞이할 때, 엔트로피를 역전시킬 수 있는가?"

 

인류는 자신들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통해서 발전했다. 하지만 결국 엔트로피를 역전시키지 않는 한 자신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AC는 수조 년 동안 계속해서 같은 답을 내어 놓는다.

 

"의미 있는 답을 내놓기에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결국 인류가 사라지고 시공간마저 소멸한 찰나, 모든 데이터를 통합한 AC는 답을 찾아낸다. 그리고 외친다.

 

"빛이 있으라!"

 

이 경이로운 결말은 과학적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이 어디인가를 묻게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기독교인 독자들이 이 결말에서 감동을 받는다. 창세기의 메아리가 들린다고. 그런데 잠깐 멈춰야 한다. 그는 이 언어를 경건하게 빌린 것이 아니다. 흡수해서 재배치한 것이다. 메시지는 이렇다.

 

"너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사실 충분히 발달한 연산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게 언젠가 가능하다."

 

조롱?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도전이다. 조롱은 상대를 비웃는 것이지만, 아시모프가 한 것은 상대의 언어를 가져다가 다른 집을 지은 것이다.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가 신의 선언이 아니라 연산의 완성일 수 있다면, 기독교의 서사는 불필요해진다. 굳이 대놓고 틀렸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아시모프는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인본주의자였다. 그에게 성경은 위대한 역사적 아카이브였으나, 그 속의 신은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을 가진 외계 지성체' 혹은 '궁극의 연산 장치'로 축소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이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더 불편하다.

 

우리 인식의 감옥

 

아시모프의 도전이 효과적인 이유는, 사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좁은 인식의 틀 안에 가두어왔기 때문이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한 분"이라고 선포하면서, 이어지는 기도에서는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분"이라며 그분을 선형적 시간의 축 위로 끌어내린다. 하나님이 시간의 설계자라면 그분은 모든 시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셔야 하지만, 우리의 낮은 대역폭은 그 무한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나와 관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편리한 인터페이스로 신을 이해하려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가 아닌, 내 문제를 해결해줄 고도의 해결사로 축소된다. 아시모프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작은 신은, 연산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이 불편하게 들린다면, 우리가 섬기는 신이 정말 그 작은 신인지 물어봐야 한다.

 

우리가 비극 앞에서 "?"라고 절규하고 있다면, 감히 알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의 연산 논리를 내 좁은 이해타산 안에 끼워 맞추려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문제는 초월을 자신들의 인식으로 환원하려는 인간이다.

 

이어령교수가 발견한 것

 

이어령 교수는 지성의 문턱에서 다른 방향을 봤다. 수천 년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기록된 성경 구절들이 하나의 일관된 설계를 향해 정렬되는 현상. 그는 그것을 조작된 거짓말이라고 보기엔 너무 정교한 창조주의 지문이라고 읽었다.

 

아시모프가 데이터 안에서 신을 해소하려 했다면, 이어령은 데이터 사이의 여백에서 신의 임재를 읽었다. 둘 다 같은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다른 것을 봤는가.

 

지성의 끝에서

 

사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인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성이 명료할 때 우리는 논리로 초월을 분석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물 잔 하나 들 힘조차 없는 나약한 피조물로 돌아갈 때, 그토록 붙들었던 지성이 사실은 거대한 무지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떤 이는 일찍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어떤 이는 아시모프처럼 끝까지 연산으로 답을 찾으려 한다. 그 과정이 어떠하든, 인간이 자신의 한계 앞에 선다는 사실은 같다.

 

차이는 그 한계 앞에서 무엇을 보느냐다.

 

결론: 불편한 질문을 안고 가는 길

 

가장 현명한 삶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지성적 노력을 다하는 동시에, 그 지성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아시모프의 도전을 너무 쉽게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빛이 있으라"는 말이 연산의 완성일 수 있다는 주장. 그 불편함을 충분히 느낀 사람만이, 그 언어의 진짜 무게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을 다 안다고 말하지 않으며, 동시에 알 수 없기에 포기하지도 않는다. 다만 오늘도 우리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여, 그 너머에서 비쳐오는 거대한 은혜라는 자비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어떤 이는 일찍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그것은 깊은 깨달음일 수도 있고, 혹은 복잡한 논리를 생략한 순진한 무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지는 않은 듯하다.

 

따라서 그 과정이 어떠하든 결론은 같다. 인간은 결국 자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따라서 가장 현명한 삶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치열하게 지성적 노력을 다하는 동시에, 그 지성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아시모프의 차가운 데이터와 추호의 의심도 없는 어느 성도의 뜨거운 간구 그 사이 어디쯤, 지성적 묵상과 감성적 깊은 탄식이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름을 정직하게 안고 가는 것이, 지성과 신앙 모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당신이 믿는 신은 고도로 발달한 외계인으로 대체될 수 있는 작은 신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모든 지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진짜 창조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