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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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까지 걸어오신 하나님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캐나다 제이슨 2026. 5. 16. 09:32

문 앞까지 걸어오신 하나님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어떤 이는 성경을 읽으며 확신을 얻는다. 어떤 이는 읽을수록 더 모르겠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조금 더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정직한 독자의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 앞까지 걸어오신 하나님

 

에베소서 1 3~4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셨다고.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결정된 사랑이다. 인간의 선택이나 행동과 무관하게, 먼저 움직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고린도전서 1 21절은 말한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들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찾아오신다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이는 방식으로. 권력이나 논리가 아니라, 작고 낮은 것으로.

 

그리고 요한계시록 3 20.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 이 장면이 가슴을 치는 이유는, 이것이 불신자의 마음 문 앞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즉 이미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공동체의 문 앞이다. 그 문을 예수님이 두드리고 계신다. 밀려나셨지만, 떠나지 않으시고.

 

세 본문을 겹쳐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보인다. 창세 전에 택하셨고, 미련해 보이는 방식으로 찾아오셨고, 밀려나셔도 문 앞에서 기다리신다. 이것은 변덕이 아니다. 처음부터 포기라는 옵션이 없으셨던 분의 일관된 신실함이다. 인간의 결단이 문을 여는 마지막 동작일 수는 있어도, 문 앞까지 걸어오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셨다.

 

교리와 장님 코끼리

 

그런데 이 세 구절을 두고도 사람들은 다툰다.

 

예정론이냐 자유의지냐. 구원은 이미 확정된 것이냐, 인간의 응답에 달린 것이냐. 전도는 방법이 중요하냐, 성령의 역사가 중요하냐. 수백 년째 계속되는 논쟁이다. 그리고 그 논쟁은 교파를 낳았고, 교파는 분리를 낳았고, 분리는 또 다른 확신을 낳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오래된 비유가 있다. 장님 여섯 명이 코끼리를 만지는 이야기. 다리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기둥 같다 하고, 코를 만진 이는 뱀 같다 하고, 귀를 만진 이는 부채 같다 한다. 모두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코끼리 전체는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비유를 조금 고치고 싶다. 우리는 장님이 아니다. 다만 백내장과 녹내장을 동시에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완전히 못 보는 것은 아니다. 어슴프레하게나마 코끼리의 윤곽은 보인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조금 보이기 때문에, 자신이 본 것이 전부라고 확신하기 쉽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더 정확하게 코끼리를 그려서 보여줘도, 보는 쪽도 같은 눈 상태라는 것이다. 해석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해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수신 기관 자체가 모두 어슴푸레하기 때문이다.

 

모름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자신이 본 것이 코끼리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이 만진 부분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다.

 

확실히 알 수 있는 본질이 있다.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셨다는 것. 그 사랑이 창세 전부터였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문 앞에 서 계신다는 것. 이것만큼은 어슴프레한 눈으로도 보인다.

 

그 본질을 붙들면서, 나머지 해석의 공간은 열어두어야 한다. 예정론을 주장한 칼뱅(John Calvin)이 만진 부분도 코끼리였고, 예정론을 거부한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가 만진 부분도 코끼리였다. 둘 다 틀리지 않았지만, 둘 다 전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한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인간을 향해 먼저 찾아오셨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성령님께서 성도의 마음 속에 찾아오셔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주의 종말이 있고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다. 물론 더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진리는 정밀하지는 않지만 코끼리 전체의 윤곽을 그려낸 것들이다.

 

하지만, 6일 창조론, 예정론, 예지예정론, 원죄론, 자유의지론, 도덕적 책임론 교리는 코끼리의 일부이거나, 아예 코끼리 근처에 있던 나무를 만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셀수도 없이 많이 분파된 각 기독교 종파가 서로 틀렸다고 비난할 수 없고, 어느 종파에 소속되었느냐 아니냐가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예상 반발과 나의 재반박

 

"교리는 선조들이 이단으로부터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 흘려 정립한 뼈대이다. 6일 창조론, 원죄론, 예정론 등을 '나무를 만진 것일 수도 있다'라고 치부하는 것은 정통 신학 체계를 부정하고 성도들을 혼란하게 만드는 종교적 다원주의나 불가지론(Agnosticism)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나는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칼뱅의 예정론도, 아르미니우스의 자유의지론도 무한하신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당대의 신학자들이 치열하게 도출해 낸 최고의 '신학적 근사 모델'일뿐이다.그러나 모델하우스가 실제 집이 될 수 없듯, 인간의 언어로 만든 교리 모델이 하나님 자체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무한(Infinite)을 유한(Finite)의 필터로 거르면 필연적으로 왜곡이 발생한다. 내가 지적하는 것은 교리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하나의 '모델'만이 완벽하다고 우기는 '지적 교만'이다."

 

"인간의 눈이 어두운 것은 맞지만, 우리에게는 완벽한 계시인 '성경'이 있고, 이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이 있다. 우리가 백내장 환자처럼 어슴푸레하게만 본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진리를 명백히 알 수 있다는 '성경의 명료성' 교리 처사를 약화시킨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가 맞다. 하지만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인간은 역사적, 문화적, 개인적 편견이라는 '필터' '노이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완벽하고 순수한 송신 신호(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와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신기(인간의 이성과 문화)에 노이즈와 왜곡(백내장·녹내장)이 있다면 출력 값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가 같은 성경을 보고도 수백 년간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 바로 그 증거 아닌가? 인간 수신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계시의 절대성을 보존하는 길이며, '모름을 인정하는 겸손'이 진짜 정직한 신앙의 시작이다."

 

바른 교리(정통 신앙)가 없으면 바른 실천(정통 실천)도 없다. 무엇이 옳은 교리인지 기준이 없다면, 이단(: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 등)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주장할 때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올바른 교적과 교파의 고백은 구원의 중요한 외적 증거가 된다."

 

"바른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20) 하셨고, 제자의 기준을 '교리 시험에서 100'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 13:35)'으로 삼으셨다. 아무리 정통 교리를 외쳐도 삶에서 증오와 분열이 나온다면 그 시스템은 고장 난 것이다. 교파의 울타리가 구원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는 말은, 문자주의적 교리 뒤에 숨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실제적인 '데이터(열매)'로 신앙을 증명하자는 가장 성경적인 요청이다."

 

결론 성령의 열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를 구분 짓는 방법은 옳은 교리를 알고 있는 것이 기준이 되지 않는다. 또한 교회나 성당의 직분 또한 그 기준이 될 수 없다. 심지어 이는 목회자나 신부에게도 해당된다.

 

성경 말씀을 줄줄이 외우며, 이 본문은 이런 뜻이라고 확신하면서도, 교회밖 삶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인생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록 도대체 이 말씀은 무슨 뜻이지라는 고민을 안고도, ‘참 사람이 좋다라는 소리를 듣고,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인생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유일하게 마주해야 할 명제이자, 누구에게나 공평한 단 하나의 질문이 있다.

 

"당신은 성령이 안에 계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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