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는 고백, 그 찬란한 행복의 조건
어린아이의 믿음: '모름'이라는 이름의 축복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유난히 따스한 아침이다. 문득 '행복의 조건'을 떠올리다 역설적인 문장에 머문다.
"무식해야 행복하다."
이는 단순히 지능이 낮아야 한다는 비하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얄팍한 지식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평안이 찾아온다는 지혜다. 성경이 요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순수함이라는 도덕적 결백보다는, 실상 '무지함의 인정'에 가깝다.
어린아이는 세상을 다 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그저 보호자의 손을 잡고 "맞다"와 "아니다"라는 단순한 진리 안에서 안식한다. 예수님께서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라고 하신 뜻도 이와 같다. 그 이상의 복잡한 변명과 수식은 결국 인간의 불안과 욕심에서 기인한 '악'의 영역일 수 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인가, 교리 위에 세운 성채인가
본래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졌다. 반석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자 살아있는 인격이신 예수님 그 자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인간은 불안해졌다. 증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을 마주할 때마다 생겨나는 지적 공포를 이기기 위해, 인간은 반석 위에 '교리'라는 견고한 성채를 쌓아 올렸다.
문제는 어느 순간 반석의 주인 자리를 박제된 문장인 교리가 차지해 버렸다는 점이다. 교리는 인간이 세상을 통제하고 규격화하기 위해 만든 안전장치다. 교파마다 교리가 다른 이유는 각자가 가진 불완전한 렌즈로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만지며 그것이 전부라고 우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에러가 가득한 사상 누각 위에 서서 안도감을 구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 무지의 범위를 확정하는 정직한 렌즈
현대 과학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무식한지를 일깨워준다. 과학은 형이상학처럼 관념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반석이 만든 주변 환경의 재질과 형태를 분석하여 우리 눈앞에 '사실'로 들이민다.
"빛이 있으라"는 선포를 현대 과학은 물리학의 언어로 번역해 낸다.증명된 과학적 사실은 우리가 '인정'해야 할 영역이지, 믿음으로 부정할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 사실에 "옳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지적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써 내려가신 자연이라는 성경을 정직하게 읽어내는 태도다.
반면, 근거 없는 형이상학적 추론은 하나님을 곡해하고 인간의 작은 상자 속에 가두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거장들이 남긴 유산: "해석을 바꿔라"
일찍이 어거스틴도, 아퀴나스도, 칼뱅도 입을 모아 말했다. 만약 이성적으로 증명된 자연의 진리가 기존의 성경 해석과 충돌한다면, 마땅히 인간의 '해석'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진리는 변하지 않으나 인간의 독해력은 늘 오답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유연한 가르침은 망각한 채, 각자의 확고부동한 교리라는 깃발만 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창세기 1장을 대할 때도 수만 페이지의 주석보다 더 힘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단 하나의 '옳다'이다.
과정과 방식은 과학의 영역(앎)에 맡기고, 근원은 신비의 영역(모름)으로 남겨두는 절제가 필요하다.
행복의 조건: 모른다는 고백이 주는 자유
결국 진짜 믿음이란, 내가 아는 것만 안다고 말하고 나머지는"모른다"라고 고백하는 '모름의 미학' 위에 서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실제가 생각보다 좋기에 감사를 찾고, 긍정적인 사람은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하듯, 우리의 지식 또한 기대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풍요로워진다. 내가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우주는 비로소 경외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무식함의 인정이야말로 가장 높은 차원의 지혜다. "나는 모른다, 그러나 주께서 하셨음을 믿는다"는 이 단순한 고백 속에, 교리가 줄 수 없는 진짜 행복과 평안이 깃들어 있다.
오늘 아침, 이 '거룩한 무식'의 자유함 속에서 나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창밖의 햇살에 "옳다"라고 화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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