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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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AI를 삼킨 SpaceX, 그리고 관중석의 르상티망

캐나다 제이슨 2026. 5. 9. 10:13

xAI를 삼킨 SpaceX, 그리고 관중석의 르상티망

 

최근 일론 머스크가 xAI를 해체해 SpaceX의 엔진 속으로 집어넣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업 재편이라기보다는우주 기반 AI를 향한 통합적 질주에 가깝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의 무모함을 비웃고, 누군가는 거대 자본제국의 탄생을 점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지금 인류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주 기반 AI'라는 트랙 위에서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도록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쟁자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서 달린다.

 

그가 조만장자가 되든, 화성에 깃발을 꽂든, 그것은 실력과 타이밍, 그리고 미국이라는 환경이 빚어낸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거대한 간섭 현상의 결과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거대한 질주를 지켜보는 관중석의 풍경이다. 100미터를 20초에 주파할 실력조차 없으면서,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는 선수의 발목 각도를 트집 잡는 이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말한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는 한다"라고.하지만 그들은 결코 트랙 위로 내려오지 않는다. 누가 시킬까 봐, 혹은 자신의 '20초짜리 민낯'이 드러날까 봐 멀리 떨어져서 망원경만 만지작거린다.

 

물론 그중에서는 실제로 트랙 위에서 뛰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경험은 오히려 자신들을 위축시킨다.그렇기에, 숨긴다. 반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좋은 기록을 내지 못했던 사람은 날 선 비판을 잘 내지 않는다.

 

결국 비판을 주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미미한 기록을 숨기거나, 아예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때로 가장 거친 비난은, 실패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자리에서 시작되거나, 애초에 트랙에 내려오지 않은 자리에서 나온다. 그리고 누구도 여기서 자유롭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그렇기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고민했다. 결국 이러한 풍경은 오늘의 소셜 미디어가 발명해 낸 새로운 병이 아니다. 인간 사회는 오래전부터 관중석을 만들어 왔다.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이런 군중 속 개인의 소멸을익명의 구경꾼이라 불렀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알맹이 없는잡담속에서 본래적 자아가 희미해진다고 보았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남을 끌어내림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감정을르상티망이라 불렀고, 피에르 부르디(Pierre Bourdieu)는 그것이 때로 문화적 취향과 구별 짓기의 언어라는 가짜 갑옷을 입는다고 생각했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더닝과 크루거는(David Dunning & Justin Kruger)는 능력이 부족할수록 자신의 한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설명했다. 이를 '우매함의 봉우리'에 서서 세상을 굽어보는 더닝-크루거 효과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비난이다. 그 다음으로 쉬운 것이 비판이다. 펜 한 자루, 노트북 컴퓨터 한 대면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권위는 비평의 날카로움이 아니라, 신발 끈을 묶고 트랙 위에 서 본 경험에서 나온다. 10초의 벽을 넘지 못한다고 선수를 책망하기 전에, 일단 본인이 100미터를 완주해 봐야 한다. 단 한 분야에서라도.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의 글을 비판하기 전에, 직접 글을 써 보고 조회수 0의 괴로움과 좋은 원고를 가지고도 '출판 거절'의 쓰라림을 맛봐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글에 묻힌 고군분투를 이해할 자격을 얻는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글에 쉽게 비판을 쏟아붓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론 머스크의 이 판단을 빌 게이츠, 래리 페이지, 젠슨 황이나 저커버그 같은 사람은 쉽게 비판하지 않는다.

 

이 논리는 신앙과 삶의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적극적인 선을 단 한 번이라도 치열하게 실천해 본 자만이, 선을 행하다 넘어진 타인을 비판할 수 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진흙탕에 발을 담가보지 않은 자의 결벽은 고결함이 아니라 비겁함에 가깝다.

 

살리에르는 물론 모차르트조차 비평받는 세상이다. 관중들은 자신들을 최소한 살리에르라고 생각한다. 모차르트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 시대를 풍미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당신이 트랙 위의 선수라면 관중석의 야유에 귀를 닫아도 좋다. 20초가 걸리든 30초가 걸리든, 자기만의 트랙에서 땀 흘리는 인간의 등판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누군가 당신을 비웃는다면 그건 당신이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냥 구경꾼일 뿐이기 때문 일 수 있다.

 

결국 역사는 관중석의 수다가 아니라, 트랙 위에 남겨진 거친 숨소리와 운동화 자국으로 기록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입술이 아니라, 당신의 운동화를 주목하신다.

 

오늘도 토론토 노숙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포장하고, 배달하고, 나눠주는 그 손길 역시, 느리지만 당신 역시 트랙 위를 달리고 있다는 증거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