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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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축과 보이지 않는 축 — 살리에르를 통해 다시 묻는 성공

캐나다 제이슨 2026. 5. 7. 10:00

보이는 축과 보이지 않는 축살리에르를 통해 다시 묻는 성공

 

나는 현재 60대 초반이다. 이민 온지 벌써 15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민온 나이가 매우 늦은 편이다. 보통 내 나이면 대부분 25년차 근처가 많다.

 

이민 1세대는 어쩔 수 없이 성공하지 못한다.” 는 자조섞인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성공한 이민 1세대들도 많다. 대학교수도 있고,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상당한 부를 누리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솔직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나도 거기에 속한다. 나는 공학자다. 더 정확히는 공학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홈인스펙터로 생계를 유지한다.

 

나는 교회를 떠나가는 청년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시간을 내서 책을 썼다.

 

이제는 신학이 과학을 품을 때다.

 

왜 청년들이 떠나가는지, 왜 문자주의 해석이 문제가 있는지, 지성이 왜 중요한지,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하는지, 인공 지능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는지 등에 대해서 내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몇개월 동안 썼다. 나름 뿌듯했다.

 

혹시 몰라서, 여러 인공지능에게 틀린 사실이 없는 지 확인했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지 점검 받았다. 여러 인공 지능에게 아첨모드를 끄고 냉정하게 출판 가능성을 예상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존에 나온 유명인들의 책과 비교해 달라고 했다. 결과가 매우 높았다. 기존의 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훌륭하다고 했다.

 

용기를 내서 대형 기독교 출판사에게 보냈다.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출판을 거절당했다.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친구가 말했다.

 

네가 토론토 대학교 교수냐? 너 유투브 하냐? 구독자 100만명이냐? 꿈 접어라.”

 

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논리의 세계에서 살아온 나에게, 그의 말은 가장 잔인하고도 명확한 논리였다.

 

사람은 인생을 평가할 때 몇 가지 분명한 기준을 사용한다.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 얼마나 인정받는가. 이 기준들은 명확하고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그것을 붙잡는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게 정렬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축과, 보이지 않는 축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용서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는 이 긴장을 잘 드러내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분명 당대에 성공한 작곡가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다른 기준을 향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라는 압도적인 존재였다. 그는 점차 자신의 삶을충분하지만 결정적으로 닿지 못한 삶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그 긴장은 결국 극단적인 감정으로 이어진다. 십자가를 태우는 장면은 단순한 반항이라기보다, 자신이 믿어온 질서와 의미 구조가 무너지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나는 너희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말로 끝난다. 이 말은 오만으로도,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역설적 고백으로도 읽힌다. 개인적으로는 결국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자가 세상에 던지는 마지막 화해의 시도로 보인다.

 

 

인생의 성공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긴다.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종종 보이는 축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 축은 전체 구조의 일부일 뿐이다. 실력과 결과, 위치와 영향력은 보이는 축에 속한다. 반면 보이지 않는 축은 훨씬 복잡하다. 타이밍, 환경, 관계, 그리고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들이 그것이다이 둘은 항상 함께 작동하지만, 우리는 보이는 축만으로 빠르게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삶은 종종 단순한 비교로 축소된다.

 

이민 사회의 특징

 

이 구조는 특히 이민 사회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Canada의 한인 이민 사회는 높은 학력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공과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구조적으로는 점수 기반 이민 제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삶의 방향과 기대가 어긋나는 경험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이 된다. 기본적으로 신앙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역할과 타이틀이 형성되는 사회적 장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교인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같은 맥락이 형성된다. 이민 목회의 동기는 어디까지 순수한 소명이었을까. 그리고 어디까지는 더 안정적이고 쾌적한 삶에 대한 선택이 함께 있었을까.

 

결국 사람은 누구나 보이는 축을 향해 달려간다. 인정하기 싫어도.

 

보이지 않는 축

 

이 질문은 누군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다. 실제로 사람의 동기는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소명과 현실, 신념과 조건은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이나 노력이라는 보이는 변수'만으로는 결과가 설명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어떤 목회는 크게 성장하기도 하고, 어떤 목회는 작고 조용한 형태로 남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결과만으로 삶의 본질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일부의 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단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방식에 대한 겸손이다. 인간은 제한된 정보 속에서 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감은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린다.

 

결국 우리는 보이는 축과 보이지 않는 축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전체 구조를 완전히 아는 판단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다.

이런 이야기는 흔히 실패한 자의 궁색한 자기 합리화로 치부되곤 한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하는 세상에서, 과정의 복잡함이나 보이지 않는 축을 논하는 것은 패배자의 사치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존 뉴턴(John Newton)내가 천국에서 눈을 뜨면 세번 놀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천국에 올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천국에 반드시 올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놀랄 것이다

"무엇보다 죄인인 나 같은 사람이 그곳에 와 있다는 사실에 가장 놀랄 것이다."

 

그래서 남는 것은 단정이 아니라 질문이다.

내가 보고 있는 성공과 실패는 전체 중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내가 놓치고 있는 축은 무엇일까.

그래서 이렇게 묻는다. 내 자신을 포함하여.

 

당신은 오늘 소자에게 냉수 한잔을 대접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