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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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 - 삶이 설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캐나다 제이슨 2026. 4. 29. 11:02

인지부조화 - 삶이 설교가 되어야 하는 이유

 

화려한 무대의 그림자

 

얼마전에 힐송 처치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현대 기독교 찬양의 메카로 불리던 힐송 처치의 화려한 무대 뒤에서 들려온 리더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찬양하던 '은혜'가 실상은 고가의 명품과 호화로운 저작권 수익으로 치환되었다는 폭로는, 거룩함이 자본과 만났을 때 얼마나 쉽게 변질되는지 주었고,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이 흔들림을 느껴서 괴로웠다.

 

이는 멀리 호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대형 교회 목사들의 호화로운 삶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한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개혁주의 복음주의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P 목사님의 아들 개척 지원 거액 요구 사건은 더욱 뼈아픈 충격이었다. 평생 '하나님의 열심'과 '인간의 실존'을 설파하던 지성적 리더조차 자기 자녀와 은퇴 후의 안위라는 사적 욕망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믿어온 '훌륭한 스승'이라는 신화가 얼마나 취약한지 폭로했다.

 

뇌가 설계한 욕망의 궤적

 

영성과 육체의 충돌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하드웨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신학적 영성이 아무리 깊어도 인간은 호르몬과 신경 회로에 지배받는 육체를 지닌 존재다. 뇌과학적으로 볼 때, 권력과 부는 뇌의 보상 회로를 강하게 자극한다. 결국, 한 번 맛본 보상은 사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반복된 자극은 내성을 만들고, 결국 더 큰 보상을 정당화하게 만다. 여기에 '내가 이만큼 헌신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전두엽의 확증 편향이 더해지면, 목회자는 자신의 사치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는 인지적 함정에 빠지게 다.

 

결국, 일부러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설계된 욕망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타락의 길로 미끄러진 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해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가난의 영성, 남겨진 성도의 자괴감

 

목회자의 패러다임은 '무조건적인 희생과 가난'에서 '삶과 사역의 균형'으로 옮겨왔다. 목회자의 가정도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건강한 것이었지만, 그 '균형'의 기준이 성도들의 평균적인 삶과 멀어지며 새로운 비극이 시작되었다.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마주친 목사님의 비까번쩍한 명차와, 낡아서 덜덜거리는 자신의 차 운전대를 잡은 성도의 손끝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존재다. 록키 산맥의 장엄함을 휴가 중에 만끽했다는 목사님의 설교가, 매일 벌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1년 내내 휴가 한 번 가지 못한 이민자에게는 자괴감 섞인 특권의 언어로 들리는 것은 당연다. 인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영성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며, 결국 '거룩한 괴물'을 만들어내고 다.

 

대안으로서의 '땀 흘리는 사역' 삶이 설교가 되는 길

 

이제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고민해야 다.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복 받은 목회자는 대형 교회의 화려한 강단이 아니라, 상가 지하에서 성도들과 함께 땀 흘리며 택배 상자를 나르는 이들일지도 모다.

 

신학적 이론에만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노동하며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일하는 목회자'들이 필요하다. 뇌의 오작동을 막는 가장 좋은 방청제는, 결국 사람을 현실에 붙잡아 두는 삶이다. 즉 리더 스스로가 성도의 삶과 같은 주파수에서 진동하는 것다.

 

실제로 부목사와 월급이 같은 담임목사도 있다. 건물은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주일은 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 드리는 교회도 많다. 이런 작은 변화도 분명 의미가 있다. L 목사님의 경우 지금도 1주일에 한번씩 택시 운전을 하신다. 대형교회 목사지만 거액의 은퇴비 대신에, 은퇴 후에는 택시 운전을 하시겠다고 한다. 비난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존경스럽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선택은 흔하지 않다.

 

결국 영성은 세련된 프로그램이나 화려한 영상이 아니라, 정직하게 살아낸 하루의 노동이 담긴 삶 자체가 메시지가 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

 

마치며

 

교회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이유는 정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실함이 없어서일 것다. 록키의 절경을 자랑하기보다 성도의 낡은 차에 함께 올라타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를 기꺼이 공유할 줄 아는 목회자. 그런 리더가 회복될 때, 비로소 신학은 과학적 이성을 가진 현대인들의 가슴에 다시금 뜨거운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