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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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캐나다 제이슨 2026. 4. 30. 21:56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사람마다 견해가 다 다른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구원론일 것이다.

 

저자는 유기성 목사님의 예수동행 시리즈 말씀을 들으면서 자주 헷갈렸다. 목사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 두 개가 서로 부딪히기 때문이었다. 자주 하시는 말씀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였다. 그런데 언뜻 듣기에 이 두 말씀은 서로 상충되게 들린다.

 

하지만 유기성 목사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로 향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온 대로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고 계신 상황이다. 이 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고, 성령님이 내주 하시기 때문에, 싫어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구원의 증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점으로 구원에 대해 분류하자면 다음의 4가지가 있을 것이다.

 

A -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함.

 

이 관점은 구원받은 자라면 반드시 삶의 변화와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본다. 행위로 구원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간주한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2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26)

 

이런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 성결교, 예수교감리회, 오순절 교단 등에 속한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기성 목사님의 경우는 기독교감리회 소속이지만 여기에 더 가깝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주장하며, 구원 이후 성화의 과정을 매우 강조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만, 거룩한 삶(성령의 열매)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위험하다고 보았다.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맥아더 (John MacArthur)'주권 구원론(Lordship Salvation)'을 주장했다. 예수님을 단순히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삶의 주인(Lord)으로 영접하지 않은 자는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B 고백과 회개를 통한 믿음과 방향성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인간은 연약함으로 인해 계속 넘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교리이다. 행위 자체보다는 마음의 중심과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중시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이 말씀들에 근거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곳이 장로교와 침례교로 볼 수 있다. 다만 장로교는 계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 고신이나 예장합동은 이 분류에 가장 잘 맞는다고 본다. 이에 반해 예장통합은 B가 기본이지만 A C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한 것으로 파악된다. 감리교의 경우 기독교감리회가 B를 기본으로 하지만 A와 섞이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장로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한 장 칼뱅(John Calvin)이다. 그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으며,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강조했다.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드신다는 논리이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며, 신자가 넘어져도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회개의 태도'가 참된 신자의 표식이라고 보았다.

 

C. 내면의 갈등(내주 하시는 성령)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 아파하고 갈등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성화는 점진적인 과정이며, 내면의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구원의 청신호로 해석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로마서 7:22~23)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루터교, 기독교 장로회등 일부 장로교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 C를 기초로 하는 교단이 존재한다고 하기보다는 B를 기초로 하여 C를 어느 정도 포용하는 교단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다.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구원받은 자 안에서도 죄 본성과 성령의 소욕이 끊임없이 싸운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 갈등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것을 강조했다.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내적 갈등을 참된 신자의 전형적인 상태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D. 조건 없음 (만민 구원론 및 보편 구원론)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낙관적 종말론이다. 지옥을 영원한 형벌이 아닌, 정화와 회개의 장소로 본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 전서 15:22)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10~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이 말씀을 근거로 보편 구원론을 펼치는 곳은 자유주의 신학 계열이나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 성향의 공동체 등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부분 이단으로 취급받고 있다.

 

고대 신학자인 오리게네스 (Origen)'만유 회복설(Apokatastasis)'을 주장하며 모든 지성적 존재가 결국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보았다.

 

카를 바르트 (Karl Barth)는 엄밀히 말해 만민구원론자는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선택받았다는 '보편적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두어 현대 만민구원론 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롭 벨 (Rob Bell)은 그의 저서 『사랑이 이긴다』를 통해 현대 복음주의권 내에서 지옥의 영원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보편 구원론적 화두를 던졌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구원론에 대한 관점이 통일되지 못하고 각각 다른 것일까? 이는 성경이 입체적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 성경은 구원을 한 문장의 정의(Definition)로 내려주기보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처방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자기 의에 빠진 바리새인들에게는 A(행함과 열매)를 강조하며 독설을 내뿜는다. (마태복음 23) 하지만 죄책감에 짓눌린 이들에게는 B(오직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며 위로한다. (로마서) 또한 신앙 권태기에 빠진 이들에게는 C (영적 전쟁)을 일깨운다. (갈라디아서)

 

결국 성경은 읽는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거기에 대응하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인간이 해석하다 보니, 굳이 한 가지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률적인 해석을 적용하지 않으신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고정된 한 점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과정'이다.

 

"너희는 구원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2:8)라고 하시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라고 하신다. 더욱이 "만물이 복종하게 될 때" (고린도전서 15:28)라고도 말씀하신다.

 

신학자나 목회자마다 이 '시제' 중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구원의 정의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미 얻었다"는 완료형에 집중하면 B가 되고, "이루어가야 한다"는 진행형에 집중하면 A의 결론에 이르고, “만물의 복종을 강조하면 D가 된다.

 

사실 이 구원의 교리는 기독교 역사상 단 한 번도 해결되지 않은 가장 큰 난제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이 말씀을 강조하면 인간의 행함은 무의미해진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키리니." (요한복음 14:15) 이 말씀을 강조하면 행함과 열매가 절대적 기준이 된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논리적으로는 충돌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둘 다 진리인 '거룩한 긴장' 상태이다.

 

결과적으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결국 구원론이 다양한 이유는, 구원이 '공식'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인 것이다.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사랑을 '설렘(감정/믿음)'으로 정의하고, 누군가는 사랑을 '책임(행동/열매)'으로 정의하며, 누군가는 '갈등을 이겨내는 과정'으로 정의하는 것과 같다.

 

유기성 목사님이나 여러 교단이 각기 다른 강조점을 두는 것은, 성경이라는 거대한 산을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수많은 사람에게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가오신다. 그것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깊은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가진 '신앙의 색깔'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인간은 각자가 제법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멀리까지 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산이 더 높을지라도, 내 발아래 있는 산이 가장 가깝기에 가장 높게 보이는 착시를 경험한다. 스스로 충분한 메타인지를 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의 산마루에 갇혀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정교한 메타인지는 '더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넓은 광각렌즈'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오른 봉우리 외에도 수많은 산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물론 광각렌즈 역시 주변부의 왜곡은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이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다.

 

결국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인간의 좁은 시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점수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누군가는 90점을 받아야 구원이고, 다른 이는 60점만 받아도 구원일 수 있다. 인간의 눈에는 억울해 보일지 모르나, 모든 인간의 환경과 내면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좌표계'에서는 그것이 가장 완벽한 공평이다.

 

결국 하나님은 무한한 좌표계를 그리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 좌표 위의 한 점을 지나가는 피조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