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신앙/신앙 사색

하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실까?

캐나다 제이슨 2026. 4. 29. 02:56

 

 

355발의 총탄, 그리고 멈춰 선 시간

 

오늘 아침, 차마 마주하기 힘든 기사 하나를 보았다. 여섯 살 소녀의 작은 몸 위로 355발의 총탄이 쏟아졌다는 소식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명분 아래, 가장 보호받아야 할 생명이 가장 잔인하게 파괴되었다. 과학이 정교해지고 무기 체계가 고도화될수록, 우리가 마주하는 비극의 밀도는 오히려 더 짙어만 간다. 그 아이의 마지막 눈망울 앞에, 인류의 문명은 과연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너진 영혼들: 가해자의 '도덕적 상처'

 

이 비극의 이면에는 또 다른 파편들이 존재한다. 직접 방아쇠를 당긴 병사들의 영혼이다. 자신이 지켜온 깊은 도덕적 신념("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을 스스로 위반했을 때 발생하는 영혼의 상처가 발생한다. 이는 극심한 자기혐오와 수치심을 유발하며, 무너져 내리는 이유가 된다.

 

과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 과정에 관여했던 기상 관측병 클로드 이더리는 평생을 환각과 죄책감 속에서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이들이 겪는 고통은 단순한 외상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도덕적 신념이 파괴된 '도덕적 상처(Moral Injury)'이다.

 

반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집무실의 지도자들은 담담하다. 원폭 투하가 수많은 미군의 생명을 구했다는 통계적 수치 뒤로 숨으며, 이를 '전략적 승리'라 부른다. 그들에게 생명은 숫자로 환산되는 자산일 뿐이지만, 현장의 병사들에게 그것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잔상이다.

 

물론 "당시 원폭이 없었다면 더 많은 미군과 일본인이 죽었을 텐데, 결과론적인 도덕성만 강조하는 것 아닌가?"라는 공리주의적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개별 생명의 존엄'과 가해자가 겪는 '영혼의 파괴'라는 본질적 비극을 고려할 때, 그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도덕적 탈참조 (Moral Disengagement)는 상대방을 '사람'이 아닌 '제거해야 할 목표물'이나 '부수적 피해'로 규정하여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를 프로그래밍하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에 근거한다. "나는 국가를 위해 결정을 내렸을 뿐"이라며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거대한 명분 뒤로 숨긴다. 또한 '학살' 대신 '작전 중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사건의 본질을 희석한다.

 

이러한 도적적 탈참조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더 큰 선(Good)'이나 민주주의 확산, 혹은 인권 보호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치로 포장하게 만들었고, 실제 폭력 행위를 '평화 유지'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

 

더 나가서, 탈냉전 이후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국제 규범을 준수하기보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일방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는 국제법이나 보편적 도덕 기준을 미국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예외주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결국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를 탄생시켰다.

 

권력을 쥔 기간이 길어질수록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뇌 부위의 활성도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UC버클리대 대처 켈트너(Dacher Keltner) 교수와 캐나다 맥매스터대 석빈더 옵하이(Sukhvinder Obhi)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권력은 뇌의 공감 중심 부위인 '거울 뉴런(Mirror Neuron)' 시스템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에게 타인의 고통은 '통계'일 뿐이지만, 현장의 개인들에게는 '전부'가 되는 비극이 여기서 발생한다.

 

영국의 정치인이자 의사인 데이비드 오웬(David Owen)은 저서에서 미국 전·현직 대통령들을 휴브리스 신드롬(Hubris Syndrome)의 사례로 꼽았다.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 대통령의 경우, 이라크 전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보 실패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타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만 고집한 점이 휴브리스의 덫으로 거론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대통령의 경우 그가 보여준 과도한 자기도취, 독선적 성향을 휴브리스 증후군의 전형적인 예로 분석했다.

 

증오의 뫼비우스 띠: 복수의 악순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가해자를 향한 복수의 칼을 간다. 9.11 테러 이후 이어진 보복 전쟁이 또 다른 테러 단체를 낳았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고, 그 재보복이 전쟁으로 번지는 이 '증오의 뫼비우스 띠'는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공동체가 입은 거대한 상처를 세대를 넘어 공유하며, 이것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 빠지면 복수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정의의 구현'이자 '생존의 이유'가 되어버려,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뒤틀린 신앙, 그리고 메시아 착각

 

가장 가슴 아픈 지점은 이 잔혹한 현장의 배후에 잘못된 신앙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 올린 '예수님이 자신을 포옹하는 AI 이미지'는 그 상징적 단면이다.

 

트럼프는 이 이미지를 올리면서 "하나님이 트럼프 카드(Trump card)를 사용하고 계신 것 같다"는 식의 캡션을 덧붙였다고 전해진다(현재는 삭제되어 확인할 길이 없다). 사실이라면 자신을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세속적 좌파, 적대국 등)에 맞서 싸우는 '신의 도구' 혹은 '현대의 메시아'로 포지셔닝한 것으로 해석된다. 예수님이 자신을 안아주고 있다는 설정은, 자신의 모든 정치적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도덕적 승인을 받았다는 시각적 선언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 개인의 오만함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를 가능하게 한 구조적 토양이 있다. 미국 공화당 지지층의 기독교는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라는 청교도적 사명감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곧 신의 뜻이라는 믿음이다.

 

여기에 "신을 잘 믿으면 현세에서 복(, 권력, 승리)을 받는다"는 번영 신학이 더해지면, 트럼프의 거침없는 태도와 공격적 국익 우선주의는 '기독교적 겸손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주신 승리의 증거'로 해석된다. "예수님은 약자의 편이 아니라, 승리할 나의 편"이라는 논리적 비약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기독교 역사에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내려온 '정의로운 전쟁론'이 있다. 원래는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조건들이었으나, 이 구조 안에서는 상대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들을 응징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적 행위'로 둔갑해 버린다. 결국 이 오만한 선민의식은 구약의 '진멸하라(Herem)'는 명령을 현대의 국가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면죄부로 오용하기에 이른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 아닌 '국익과 복수를 집행할 강력한 장군'으로 보는 것이다.

 

언덕 위의 도시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것일까? 미국 공화당 지지층의 기독교는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라는 청교도적 사명감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곧 신의 뜻이라는 믿음이다. 이 논리 안에서는 미국의 국익이나 미군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 순위가 되며, 이를 위한 무력 사용은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모든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보편적 가치보다 "우리(신의 편)의 안녕"이 앞서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결국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과 현 집권당인 공화당 지지자라는 정치적 정체성이 강력하게 결합(Fusion)되면, 종교적 교리와 정치적 노선이 충돌할 때 교리를 정치적 논리에 맞춰 재해석하거나 합리화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낙태 문제에서는 '생명의 존엄'을 극도로 강조하지만, 전쟁터의 민간인 희생에 대해서는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침묵하거나 담담해지는 '선택적 도덕성'이 나타난다.

 

결국 이 모든 현상은 '집단 내 편향(In-group bias)'이다. 정치적 양극화와 '끼리끼리' 문화가 형성되면서 정치적 에코 체임버(Echo Chamber)가 형성되었다.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가 서로의 뉴스나 의견을 거부하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맞는 정보만 소비하며 내집단을 강화하는 현상이 극심하다. 상대 정당 지지자에 대한 혐오나 불신이 증가하여,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을 같은 미국 시민으로 보지 않고 적대시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백인우월주의의 함정

 

집단내 편향의 대표적인 예가 백인우월주의이다. 역사적으로 백인 집단이 소수 인종(흑인, 히스패닉 등)을 차별하거나, 사회·경제적 기회에서 배제하는 구조적 차별이 존재해 왔는데, 최근들어 백인 우월주의와 구조적 차별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미국 내 백인 우월주의와 극우주의의 흐름은 최근 몇 년 사이 더욱 복잡하고 위험한 양상으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백인 우월주의와 반정부 극단주의 단체의 활동은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2024년 말 기준으로 미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혐오 및 반정부 극단주의 단체는 1,37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과거에는 사회 외곽(Fringe)에 머물던 백인 우월주의 담론이 이제는 보수적 주류 정치권의 수사학(Rhetoric)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있다. 특히 '백인 학살(White Genocide)'이나 '거대 교체(Great Replacement)' 이론 같은 극단적인 음모론이 일반적인 이민 반대 논리나 정책 비판과 결합되어 대중화되고 있다.

 

2025 8월에 발표된 FBI의 최신 증오 범죄(Hate Crime) 통계는 상황의 심각성을 수치로 보여준다. 2024년 한 해 동안 보고된 증오 범죄는 약 11,600건 이상이며, 피해자는 14,000명을 상회한다. 전체 단일 편견 기반 범죄 중 53.2%가 인종/민족/혈통을 이유로 발생했다. 이는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 실제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이다. 종교 기반 증오 범죄 중 70% 가까이가 유대인을 향하고 있으며, 이는 백인 우월주의와 반유대주의가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의 백인 우월주의는 단순한 인종 차별을 넘어, '미국은 백인 기독교인의 나라'라는 신권 정치적 정체성과 결합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암호화된 메신저를 통해 '백인 전용 거주 지역(Whites-only communities)' 건설을 모의하거나, 남성 우월주의(Male Supremacy)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증오 집단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정부 관료나 공적 인물들이 '고국(Homeland)', '재이주(Remigration)' 같은 백인 민족주의적 은어(Dog-whistle)를 공식적인 계정에서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이것이 지지층에게 일종의 '행동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흥미롭고도 씁쓸한 소식은, 지난 수십 년간 이런 혐오 단체들을 감시해 온 남부빈민법률센터(SPLC)가 최근 거액의 기부금을 횡령하고, 오히려 극단주의 단체들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연방 대배심에 기소(2026 4)된 사건이다. 감시해야 할 기구가 오히려 혐오를 부추기거나 이를 비즈니스화했다는 의혹은, 미국 내 인종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고 그 구조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극우 세력은 현대 국가(미국이나 이스라엘 등)를 고대 이스라엘과 동일시한다. 자신들의 정적이나 타 인종, 타 종교인을 '가나안 족속'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폭력을 '거룩한 전쟁(Holy War)'으로 둔갑시킨다.

 

정치적 극우 세력은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현대의 정교한 무기 체계(미사일, 총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다. 6살 아이에게 쏟아진 355발의 총탄을 보며 그들이 담담할 수 있는 이유는, 상대방을 인간이 아닌 '진멸해야 할 악의 상징'으로 치환했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 예수님은 이 '헤렘'의 개념을 물리적 학살이 아닌, '자기 내면의 죄를 멸하는 것' '영적 싸움'으로 완전히 승화시키셨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전혀 모르는 것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외친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이 땅의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법을 행하고, 타인의 생명을 짓밟으며 권력을 수호한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실까? 권력을 쥐고 예수를 포옹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지도자일까, 아니면 차가운 거리에서 355발의 총탄을 온몸으로 받아낸 무고한 아이일까? 답은 자명하다. 하나님은 가장 작고 낮은 곳에서 울고 있는 그 생명과 함께 계신다.

 

기독교인의 열매: 다른 뺨을 돌려대는 용기

 

참된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압도적인 무력이나 정치적 승리에 있지 않다. 오직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이라는 '성령의 열매'로만 증명될 뿐이다. 한 뺨을 맞으면 다른 뺨조차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겁함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려는 가장 강력하고도 고귀한 용기다.

 

이제는 우리가 물어야 한다. 우리가 맺고 있는 열매는 무엇일까? 과학의 힘으로 더 정교한 총탄을 만들고 신학의 이름으로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이야말로 과학적 이성을 품은 따뜻한 신학이 필요한 때이다. 6살 아이의 죽음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하는 마음, 그곳이 바로 진정한 신앙이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씹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