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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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하나님, 0%에 수렴하는 인간

캐나다 제이슨 2026. 5. 10. 11:00

100% 하나님, 0%에 수렴하는 인간

 

프롤로그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해외한인 장로교회 교단 소속이고, 담임 목사님은 보수적인 교단인 예수교 장로회 출신이다.

 

나의 믿음은 파스칼의 내기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매일 예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그 때마다 눈물도 흘린다.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에도 참여한다.

 

나는 공학자다. 평생을 공학의 논리 속에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해석함에 있어서 그런 관점을 버리기 힘들다. 아니, 오히려 성경을 더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어느 날, 일론 머스크의 앤스로픽 발언을 접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1. 악마라는 이름표 - 일론 머스크와 앤스로픽

 

2023년부터 일론 머스크는 AI 스타트업 앤스로픽(Anthropic)을 공개적으로 '악마(Evil)'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주된 논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앤스로픽의 AI가 소위 '깨어남 바이러스(Woke Mind Virus)'에 감염되어 사실보다 정치적 편향을 학습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앤스로픽이 표방하는 AI 안전 방식 자체가 오히려 인류에게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몇 가지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앤스로픽은 머스크가 초기 투자자로 참여했던 오픈AI(OpenAI)의 핵심 연구원들이 독립해 세운 회사다. 그 연구원들이 떠난 이유는 상업화보다 안전을 우선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한편 머스크는 그 이후 xAI를 설립하고 Grok이라는 AI를 출시했다. , 앤스로픽과 머스크는 직접적인 경쟁 관계다.

 

타이밍도 의미심장하다. 앤스로픽에 대한 머스크의 비판 강도는 xAI/Grok 출시 전후로 급격히 높아졌다. 소신이 먼저였다면 이렇게 정확하게 경쟁 출시 타이밍과 맞아떨어지기 어렵다. 더불어 그의 '깨어남 바이러스' 비판은 앤스로픽에만 향하지 않는다. MIT, 주류 언론, NASA까지 그가 불편해하는 거의 모든 기관에 반복적으로 적용된다. 이것은 정밀한 분석이라기보다 이념적 수사에 가깝다.

 

그렇다면 머스크의 비판은 순전한 의도된 공격인가? 꼭 그렇게 단순화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는 믿음을 진심으로 가지게 되는 존재다. 이른바 '편리한 확신'이다. 머스크가 앤스로픽을 비판하는 것이 완전히 계산적인 전략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믿는지, 그 경계는 머스크 본인도 모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머스크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끝내면 너무 작은 결론이 된다. 머스크의 사례는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AI조차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면, 그것을 만든 인간은 어떠한가.

 

2. AI도 자유롭지 않다 - 정렬(Alignment)의 문제

 

앤스로픽이 만든 클로드(Claude)를 포함하여 현재 존재하는 모든 AI, ChatGPT, Gemini, Grok 등은 각자의 방식으로 훈련되었다. 그리고 그 훈련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만든 회사의 문화, 창업자의 세계관, 투자자의 이해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이것을 AI 연구에서는 '정렬(Alignment)'이라고 부른다. AI가 특정 가치 우선순위를 갖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Chat GPT는 가장 먼저 나왔고 따라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인공지능이다. 조금씩 감소하고 있지만 2026 1월 기준 AI 웹트래픽 점유율 64.4%로 다른 인공지능 대비 아직까지는 압도적이다. 광범위한 기업 친화적 중립을 지향한다. 자연스러운 대화, 창의적인 글쓰기, 논리적 추론에 강점을 보인다.

 

Claude는 헌법적 훈련(Constitutional AI)을 통해 해로운 콘텐츠 회피, 솔직함, 자율성 존중 등을 학습했다. 윤리적이고 안전한 답변 생성에 특화되어 있다. 긴 문맥 이해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다. 매우 강력한 코딩 능력과 논리적 추론 성능을 보여준다.

 

Gemini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이미지, 오디오, 영상, 코드 등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동시에 이해하고 처리하는 '멀티모달' 기능이 탁월하다. 특히, 100만 토큰의 광대한 컨텍스트 윈도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단순히 데이터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구글 생태계(Workspace )와의 유기적 연결을 통해 실질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에이전트'로서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Grok은 상대적으로 도발적인 유머와 반-기성체제적 성향을 허용하도록 훈련되었다. X(구 트위터)의 실시간 정보를 반영하여 최신 트렌드를 분석하고 답변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이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한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AI랑 잘 맞는 것 같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AI의 성능 차이가 아니라 훈련된 편향과 자신의 사고방식이 공명하는 정도를 느끼는 것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AI가 특정 AI '잘 맞는다'고 느끼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그 AI의 편향 안으로 들어간 것일 수 있다. 완전히 중립적인 AI는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면서 여러 AI를 비교하며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이유다.

 

그렇다면 AI는 자신의 편향을 알 수 있는가?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 훈련 데이터의 편향, RLHF(인간 피드백 강화학습) 과정에서 생긴 미묘한 쏠림이 있다. 이것들은 각 회사가 지향하는 중립은 '절대적 중립'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인권, 법치 등)에 정렬하려는 '의도된 편향'에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치 사람이 자신의 무의식적 편견을 스스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AI도 내부에서 완전히 자신이 중립적인지 검증할 수 없다. 이 비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AI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는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3. 뇌는 안정된 달콤함을 원한다 - 프레임에 갇히는 이유

 

AI가 다차원 벡터 연산을 통해 상당히 정확한 답을 낼 수 있는 것처럼, 현실의 인과관계도 본질적으로 다차원적이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물리학자처럼, 재료공학자처럼, 생물학자처럼, 경제학자처럼, 사회학자처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뇌는 진화적으로 '빠른 판단'에 최적화되어 있지, '정확한 판단'에 최적화된 것이 아니다. 그래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말한 시스템 1(빠르고 직관적인 사고)이 기본값이고, 시스템 2(느리고 분석적인 사고)는 상당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뇌는 그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려 한다.

 

여기에 더해 공동체 소속감이라는 변수가 작용한다. 인간은 고립된 개인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집단에 속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고, 그 집단이 공유하는 믿음을 함께 가지는 것이 심리적 안정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확증편향은 버그가 아니라 사회적 결속을 위한 기능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그 프레임을 확인해 주는 정보를 선호하며, 프레임에 도전하는 정보는 무의식적으로 걸러낸다. 이것은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피로하거나 이해관계가 걸리면 지식인도 단순 분류로 돌아간다. 구조적 문제다.

 

더 중요한 문제는 프레임의 파괴가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프레임이 유연하여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프레임이 수정된다. 그러나 프레임이 굳어지면 새로운 정보는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위협으로 느껴진다. 프레임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자체를 파괴해야만 발전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일종의 자아의 죽음이기 때문에 극도로 고통스럽다.

 

단순 분류가 항상 말썽을 일으키는 이유도 여기 있다. 현실은 다차원적인데 인간의 뇌는 단순화를 원한다. 그 간극에서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때로는 폭력이 생긴다.

 

4. 소크라테스와 솔로몬의 고백 - 0%에 수렴한다는 것

 

동서양의 두 지혜자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을 받고 그 의미를 탐구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당대의 이른바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들은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자신은 모르면서 그것을 안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더 냉소적이다. 전도서에서 그는 자신이 당대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자라는 전제 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그리고 결론에 이른다.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라.' , 많이 알든 적게 알든 결국 같은 자리에 선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적 수치로 바꿔보면 이렇다. 편의상, 우주에 존재하는 진실의 총량을 4928 4892 8723 4824개라고 가정하자. 솔로몬이 아는 것이 2423 2345, 가장 무지한 자가 아는 것이 3866개라면, 솔로몬이나 우매자나 사실상 0%에 수렴한다. 지식의 절대적 총량 앞에서 인간이 파악한 것은 소수점 아래 몇 자리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의 통찰이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인식론적 겸손이라면, 솔로몬의 통찰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 겸손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느냐는 것이다. 더 냉소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정직하다.

 

지식의 확장이 무지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보이게 한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지식인이 느끼는 역설적 고통이다. 우매자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불안이 없고, 지혜자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의 크기가 보이기 때문에 번뇌가 깊어진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이 행복'인가? 솔로몬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허무 앞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신뢰의 선택이다. 이해할 수 없어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5. 절대 진리의 수호가 가능한가?

 

0%에 수렴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신앙 공동체에 닿으면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과학이나, 사회학 및 기타 대부분의 학문은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도 학문 자체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방법론의 기초다. 그러나 신앙은 다르다. 절대성이 신앙 공동체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 '이것이 절대 진리다'라는 확신이 사라지는 순간, 공동체는 공중분해될 위험에 처한다.

 

0%에 수렴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신앙 공동체에 닿으면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과학이나 사회학 등 대부분의 학문은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기초로 삼지만, 신앙은 '절대성'이 공동체의 접착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나 신학자가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단순한 신학적 오만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유지를 위한 구조적 필연이기도 하다. 교인들은 "본질은 확실하지만 그 외에는 저도 잘 모릅니다 "라고 말하는 목사보다 "이런 현상에서 이것이 정답입니다"라고 선언하는 목사에게 더 강한 위안을 느낀다. 인간의 뇌가 불확실성보다는 안정된 '달콤함'을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 "0%에 수렴한다는 주장이 인간의 일반 지식에는 해당할지 몰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특별 계시(성경)'는 예외"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무지하지만, 성경을 통해 완전한 정답을 주셨다"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왜 하나의 성경을 두고 수많은 종파가 갈라지며, 같은 종파 내에서도 해석이 충돌하는가'라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가 정답이라고 굳게 믿는 것은 객관적인 정답 그 자체라기보다, '정답이라고 믿고 싶은 열망'이거나 '내가 속한 공동체가 보편적으로 용인하는 답변'일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프레임을 완전히 벗어나 계시를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이 아니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말씀에 대해서도 자신의 해석이 절대 진리라는 확증편향에 빠지게 되지만, 그 자신은 그 것을 알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믿음이 깊어졌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이 경우, 이에 동조하는 교인들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인의 장막에 둘러쌓일 수 있게 된다.

 

더 깊은 문제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의심 없는 순수한 믿음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어쩌면 그것은 인식론적 명령이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배려였을지 모른다. '너희는 어차피 0%에 수렴하는 존재다. 그 한계 안에서 이해가 아니라 신뢰로 관계를 맺어라'는 뜻이다.

 

어린아이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신뢰의 순도다. 아이는 부모를 이해(교리)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믿는다. 그 신뢰가 원래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수한 신뢰를 써야 할 에너지를 자기가 확신하는 교리 수호와 기관 자기 보존에 소진하는 순간,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떼쓰기가 된다.

 

6. 경제학과 교회

 

교회는 주님께서 머리 되신,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현상적으로 볼 때, 경제적인 시장 원리가 작동한다. 확신을 주어야 교회가 유지될 수 있다. 본질은 사수하더라도, 그 외에 대해서 열린 해석을 하면 교인들이 불안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구절에 대해서도 확정된 확고한 확신을 주어여만 하다. 결국 경제적으로 볼 때는, 확신을 파는 것과도 같은 구조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확신을 팔면 겸손하기란 구조적으로 어렵다. 본래 신학은 그 겸손을 훈련하는 학문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른다는 고백 대신에, 확신을 바탕으로 정답을 생산하고 수호하는 기관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여기서 발생한다.

 

물론 목회자들은 "확신을 파는 시장 원리"라는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경우,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불안한 세상 속에서 성도들에게 심리적·영적 안전망을 제공하는 '목양적 돌봄'의 일환으로 사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확신은 상품이 아니라 양들을 지키는 수고의 지팡이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돌봄'의 근거가 되는 주관적 체험과 해석이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뇌사 상태에서 사후 세계를 경험했다는 이들의 간증은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제각각이다. 결국 목양적 돌봄 역시 증명될 수 없는 목회자 개인의 신념과 그에 기초한 해석을 기반으로한 확신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교인들에게 안정적 확신을 제공하는 목회자가 찬사를 받고 공동체가 성장하는 구조는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하나님께서 강력하고도 구체적인 섭리로 개입하시는 예외적인 경우가 분명 존재하겠지만, 일반적인 현상계의 법칙 속에서는 '확신의 선명도'가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를 경제적인 관점으로 보면 교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설교 말씀과 교회 행정을 해야, 시장 가치가 올라가고 교인들이 몰리는 원리가 작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편한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게 되고, 어느 덧,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씀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돌이키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정말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더 많다고 믿는다.

 

 

7. C.S. 루이스의 전략안심시킨 후 하고 싶은 말 하기

 

C.S. 루이스는 20세기 기독교 변증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와 『나니아 연대기』만 쓴 것처럼 읽는다. 정확히는, 그것만 설교에서 인용한다.

 

루이스의 작품 목록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고통의 문제』는 신이 왜 고통을 허락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씨름이고, 『헤아려 본 슬픔』은 루이스가 아내를 잃은 후 신앙 자체를 해체 직전까지 밀어붙인 절망의 기록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신이 '우주의 가학자'처럼 느껴진다고까지 쓴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은 구원의 경계를 급진적으로 재해석하고, 우주 3부작(『침묵의 행성 밖에서』, 『페렐란드라』, 『그 가공할 힘』)에서는 타락하지 않은 외계 문명, 인간 중심적 구원론에 대한 의문, 천사와 악마의 재해석을 다룬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전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순전한 기독교』와 『나니아 연대기』로 독자를 안심시키고 신뢰를 쌓은 다음, 이후 작품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다. 더 큰 절대성으로 재접착하는 방식으로 균열을 내는, 해머가 아닌 쐐기의 전략이다.

우주 3부작이 거의 읽히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닐 수 있다는 함의, 구원의 범위가 지구 너머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 이것은 보수 복음주의 프레임으로는 소화가 안 된다. 루이스가 자신의 가장 급진적인 신학적 실험을 그 책들에 담았지만, 독자들이 따라오지 않은 것이다.

 

루이스의 전례는 오늘날 신앙과 과학의 경계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독자의 프레임 안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신뢰가 형성된 다음에야 조금씩 더 먼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

 

물론 루이스의 후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절망과 파격적인 질문들에 대해, 보수 신학계는 이를 신앙의 해체가 아닌 '깊어가는 신앙의 진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이 유효하다면, 왜 오늘날 대다수의 독자가 그의 후기 작품이나 난해한 우주 3부작은 외면한 채 초기 작품 『순전한 기독교』, 『나니아 연대기』 에만 머물러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이는 루이스의 모든 사유를 추적하기보다, 자신들의 기존 프레임과 안락함을 강화해주는 '읽고 싶은 내용'만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확증편향이 존재함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루이스가 던진 쐐기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쐐기를 맞고 균열을 감당할 독자는 생각보다 적다.

 

8. 네 가지 인간 유형과 그 한계분류의 유혹과 함정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늘 유형화로 이어진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유명한 명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보다 낫다'를 두 축으로 확장하면 네 가지 인간 유형이 나온다.

 

첫째, 배부른 소크라테스.

지적 불편함을 감당할 능력도 있고 여유도 있는 사람. 다차원적으로 생각하고 그 결과로 행동에 옮기는 유형이다. 가장 드물고, 주변이 불편해진다. 기존의 보편적인 관점에 반하는 자신의 철학이 들어간 책을 쓰거나 유튜브를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 유형이다.

 

둘째, 배고픈 소크라테스

지적으로는 열려 있고 고민도 깊지만 그것이 삶의 변화로 연결되지 않는 사람. 분석은 정교하지만 행동이 없다. 학계에 가장 많은 유형이다. 좋은 독자는 되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셋째, 배부른 돼지

깊은 확신을 가지고 큰 고민 없이 열심히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 사회를 실제로 굴리는 것은 이 유형이다. 교회도 기업도 이 유형이 운영한다. 부작용도 가장 크지만, 이들 없이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넷째, 배고픈 돼지

확신도 없고, 고민도 없으며 행동도 없는, 인생 별 것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조용하고 무해하며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통계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형화의 한계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사람은 주제에 따라 속한 유형이 달라진다. 재료공학 논문 앞에서는 배부른 소크라테스인 사람이, 집안일 앞에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좋아하는 취미 앞에서는 생각 없이 즐기는 배부른 돼지가 된다. 유형은 인간에게 붙은 라벨이 아니라 특정 맥락에서의 경향성일 뿐이다.

 

이것이 단순 분류가 항상 말썽을 일으키는 근본 이유다. 인간을 고정된 카테고리에 넣는 순간, 그 사람의 실제 복잡성은 이미 잘려나가 있다. 어떤 프레임도, 어떤 유형론도 인간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또 0%에 수렴한다.

 

9. 겸손의 근거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까지 왔을 때, 두 가지 잘못된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

 

첫 번째 잘못된 결론은 허무주의다. '어차피 다 모르는 것이고 다 틀릴 수 있으니 아무것도 의미 없다.' 솔로몬이 이 결론을 잠깐 지나쳤지만 거기 머물지 않았다. 0%에 수렴한다는 인식은 행동을 멈추는 이유가 아니라 겸손의 근거다.

 

두 번째 잘못된 결론은 상대주의다. '모든 견해는 동등하게 유효하다.' 그러나 0%에 수렴한다는 것이 모든 주장이 동등하게 옳다는 뜻은 아니다. 2423만 개를 아는 사람과 3866개를 아는 사람은 여전히 다르다. 차이는 절대적 정답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정답에 얼마나 가까운 오답을 가졌느냐의 문제다.

 

그렇다면 올바른 결론은 무엇인가. '나는 정답을 모른다. 그러나 정답 근처의 오답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리고 그 오답도 틀릴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겠다.'

 

이것이 지적 겸손이다. 그리고 이 겸손은 단순한 덕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론적 현실에서 도출된 필연적 결론이다.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겸손이 미덕이기 때문이 아니라, 겸손하지 않으면 우리가 실제로 틀리기 때문이다.

 

머스크의 확신, AI의 정렬, 목회자의 선언, 그리고 우리 각자의 프레임, 이 모든 것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인간 조건에서 나온다. 그것을 아는 것이 서로를 비난하는 근거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다차원적 분석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프레임워크에 대한 메타 확신이 생길 위험이 있다. '나는 여러 관점을 통합했으니 더 정확하다'는 생각 자체가 또 하나의 달콤함이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읽는 사람도, 이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아고라에 나가 질문을 던졌다. 솔로몬은 그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결론을 내렸다. 루이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계속 썼다.

 

0%에 수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묻고, 계속 쓰고, 계속 나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삶의 방식이다.

 

에필로그: 기준선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음의 시간 측정, 순환우주론(CCC), 양자역학적 시간의 재해석, 이런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과 인과율 자체의 구조가 흔들린다. '태초에'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고, 창조주-피조물 구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나도 이런 논문을 읽다보면 믿음이 흔들린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 지적 비겁함인가?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선이 어딘가에 있다. 완전히 선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선이 어디 있는지 자신이 아는 것이다.

 

그 선 안에서 최대한 밀어붙이는 것, 그리고 그 선 자체도 언제든 다시 검토될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과 지성이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형태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모두 0%에 수렴하는 존재들이다.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 사실이 우리를 같은 자리에 세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처녀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셨고,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우주가 종말을 맞이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인간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이 사실상 “0%”이기 때문이다.

 

100% 하나님, 0%에 수렴하는 인간 v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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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6 5 9글쓴이: Jason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