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신앙/신앙 사색

금관을 벗고 벌판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의 실증적 사랑

캐나다 제이슨 2026. 5. 11. 12:36

금관을 벗고 벌판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의 실증적 사랑

 

내가 젊었을 때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설교가 있다. 부흥회였기에 연단에 서신 분은 이름난 부흥강사였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하는데, 교회는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나는 한동안 그분을 노려봤다. 물론 거리가 멀어 그분이 나를 인지하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그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았다. 종교의 본질적 가치가 사회사업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셨을 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했다. 찬양과 구제는 결코 분리될 수 있는 모듈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제된 화려함과 얼어 죽은 제비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는 화려한 금박과 보석으로 치장된 채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왕자 동상의 이야기이다.

 

그는 도시의 높은 곳에서 비로소 낮은 곳의 비참함을 목격한다. 왕자는 자신의 눈인 사파이어와 칼자루의 루비, 몸을 감싼 금박을 하나씩 떼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다. 그 곁에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기를 포기하고 왕자의 심부름꾼이 되어 겨울 추위 속에서 죽어간 '제비'가 있었다. 겉모습이 초라해진 왕자의 동상은 용광로에 던져지지만,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반응했던 그의납 심장만은 제비와 함께 결코 녹지 않은 채 하늘의 보석이 된다.

 

금관을 벗긴 민중의 손길

 

이와 놀랍도록 닮은 꼴인 우리네 노래가 있다. 김지하 시인의 글에 김민기 작곡가가 곡을 붙인 <금관의 예수>이다. 노래 속 예수는 화려하고 차가운 금관을 쓴 채 성당 안에 박제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를 해방시키는 것은 종교 권력자가 아니라, '얼어붙은 저 벌판'에서 신음하는 가난한 민중이었다. 그들이 굶지 않기 위해서 예수의 머리에서 무거운 금관을 벗겨낼 때, 비로소 예수는 박제된 우상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숨 쉬는 실체로 거듭난다.

 

<행복한 왕자>의 제비처럼, 민중의 투박한 손길이 형이상학적 권위를 깨고 참된 신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해방과 민중, 그 신학의 빛과 그림자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으로 이어졌다. 이 신학들은 신을 관념의 성소에서 끌어내어 역사적 현실과 고통의 현장으로 모셨다는 점(현장성)에서 큰 울림을 주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사회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증거'임을 일깨워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복음을 지나치게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만 환원하여, 인간 내면의 영성과 초월적 구원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형이하학으로 문제를 푸신 예수님

 

흔히 신학은 이 거대한 진리를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내려 애쓴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훨씬 명쾌하고 공학적이었다. 그분은 관념의 구름 위에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인간의 몸(물리적 실체)을 입고 역사라는 시공간 속에 착륙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Incarnation)이다.

 

예수님은 세련된 형이상학을 논하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아니라, 삶의 무게가 무거운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다. 배고픔, 채찍질, 그리고 죽음이라는 지극히 형이하학적인 고통을 직접 겪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이 결코 '가설'이 아닌 '역사적 실증 데이터'임을 입증하셨다.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문제를 풀어버리신 것이다.

 

백보좌 앞에서의 최종 검수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할 백보좌 심판의 기준은 뜻밖에도 지극히 형이하학적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고상한 신학 이론을 정립했는지 묻지 않으신다. 대신 "너희가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헐벗을 때 입혔는가"를 물으신다. 그 대상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우리 곁의 소외된 자들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형이하학적 실천' 없는 '형이상학적 외침'에만 매몰되어 혹시라도 실천은 무늬만 있고, 그저 "우리끼리 행복하게 잘살아보세"라는 폐쇄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성령이 내재하시면 열매는 자동으로 맺힌다. 그렇다면 열매가 없다는 것은, 나무가 죽었거나, 처음부터 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헌금의 99%가 내부 순환에 쓰인다는 것은 감정적 판단이 아니라 시스템 진단이다. 에너지가 외부로 흐르지 않는 시스템은 결국 열적 죽음에 이른다.

 

훗날 심판대 앞에서 "뉘시요?"라는 뼈아픈 거부 메시지를 듣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금관을 쓰신 박제된 동상에서 해방시켜 드려야 한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자. 그들은 먼저 먹인다. 그리고 학교를 세운다. 병원을 짓는다.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 굶주린 이의 배를 채우는 빵 한 조각이라는 '형이하학적 결과물'을 도출해 낼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박제를 넘어 살아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질문과 답

 

아마 이 글을 읽는 목회자분들이 있다면 이런 주장들을 할 것이다.

 

"교회는 구제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구제를 강조하다 보면 교회가 NGO나 사회복지단체처럼 변질될 위험이 있다."

"예배를 위한 인프라와 교육, 영적 돌봄도 '생산적인 에너지 소비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이며, 빵을 주는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우선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표적(Sign) 일뿐 본질은 '하늘나라'라는 형이상학적 진리에 있다."

"성령의 열매는 내면의 성품이지, 눈에 보이는 구제 성적표가 아니다."

시스템 진단이라는 표현은 신앙의 신비로운 영역을 지나치게 공학적인 '인풋-아웃풋' 결과물로 환원시킨다

"임대료와 인건비를 내고 나면 외부로 흘려보낼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남지 않는 '엔트로피적 한계'가 있다."

99% 내부 순환이라는 수치가 교회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이 주장들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핵심은 '우선순위'라는 개념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와 사회적 실천은 선택지가 아니다. 심장이 수축과 이완을 번갈아야 피를 순환시키듯, 예배와 대 사회 활동은 하나의 운동이다. 수축만 하는 심장은 펌프가 아니라 경련이다.

 

"영혼 구원이 우선이고, 빵은 그다음"이라는 주장은 언뜻 경건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나병환자의 몸을 손으로 만지셨고, 죽은 나사로를 눈물을 흘리며 살리셨다. 그것이 단순한 '표적'이었다면, 왜 그분은 굳이 우시면서까지 하셨는가.

 

응급실 의사가 "생명이 최우선입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처치를 미룬다면, 그것은 우선순위가 아니라 직무유기다. "영혼 구원이 우선"은 진술이지, 빵을 안 줘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임대료와 인건비를 내면 남는 게 없다"는 현실론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스템 설계의 문제다. 생존 비용이 전부를 잠식하도록 설계된 구조라면, 그 구조 자체를 진단해야 한다. 실제로 헌금의 일정 비율을 대외 지출로 먼저 책정하는 교회들이 존재한다. 예산이 넉넉해서가 아니다. 구조적으로 먼저 설계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내부 순환에만 쓰이고 외부로 흐르지 않는 시스템은 열역학적으로 결국 평형 상태(에너지가 순환하지 않아 모든 기능이 멈춰버린 차가운 상태), 즉 죽음에 이른다. 이것은 감정적 비판이 아니라 시스템 진단이다. 선교지의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 그들도 예산이 빠듯하다. 그럼에도 에너지는 밖으로 흐른다.

 

"신앙의 신비를 공학적 인풋-아웃풋으로 환원한다"는 비판은 가장 정교한 반론이다. 맞다, 성령의 역사는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열매는 눈에 보인다. 예수님 본인이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하셨다.

 

형이하학은 단순히 물질적 도움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성육신의 논리가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고백이 삶이라는 물질로 치환될 때, 비로소 신앙은 박제를 넘어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

 

성령의 열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사신 공동체이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성도도 교회다. 그래서 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는 성령이 계신다. 그렇다면 그 교회는 결코 닫힌 시스템이 되지 않는다. 만약 닫혀 있다고 판단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안에 성령님이 내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맺기 싫어도 성령의 열매가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