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신앙/신앙 사색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일상의 기적 – 신형 기차와 낡은 기차

캐나다 제이슨 2026. 5. 14. 10:10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일상의 기적 – 신형 기차와 낡은 기차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님은 1834년 영국 에식스주에서 태어났다. 목회자 집안에서 자라며 어릴 때부터 청교도 서적을 탐독했고, 15세 무렵 눈보라를 피해 들어간 작은 초창기의 감리교회에서 “나를 바라보라”는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
 
그는 정규 신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다. 대신 목사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엄청난 양의 신학 서적을 독파하며 독학으로 신학적 뼈대를 세웠다. 당시 영국 침례교는 국교회인 영국 성공회와 달리 엄격한 학위나 정해진 신학교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목사 안수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개별 교회가 보기에 신앙이 독실하고 설교의 은사가 탁월하다고 판단되면, 공동체의 결의를 통해 설교자로 세우고 목회자로 인정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런 배경을 통해 스펄전은 17세에 워터비치(Waterbeach) 침례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이미 ‘소년 설교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불과 2년이 지난 19세의 나이에 런던의 유서 깊은 ‘뉴 파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청빙을 받아 사역지를 옮겼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면서 기존 예배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861년,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최대 규모의 메트로폴리탄 타버클(Metropolitan Tabernacle)을 완공했다.
 
당시 영국에서 'Church'라는 단어는 주로 국가가 공인한 영국 국교회의 성당 건물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 스펄전이 속했던 침례교는 자신들의 예배당을 '타버클(Tabernacle, 성막/회막)'이나 '채플(Chapel)'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건물의 화려함보다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성막'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이동하는 복음의 현장"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마이크가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명료한 발성과 뜨거운 영성으로 매 주일 수천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의 설교문은 매주 인쇄되어 전 세계로 팔려 나갔으며, 이는 현대 기독교 출판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스펄전 목사님의 생애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당시 영국 교계 내부에 스며든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 것이다. 그는 진리가 타협되는 것을 보고 “복음이라는 철로에서 기차가 이탈하고 있다(Downgrade)”고 비판하며 침례교 연맹을 탈퇴하기도 했다. 이 투쟁 과정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끝까지 성경의 무오성과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
 
그는 설교뿐만 아니라 고아원 운영, 목회자 대학 설립 등 사회적 사역에도 힘썼다. 그는 매우 위트 있고 인간적인 면모를 가졌으면서도, 설교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강조했다.
 
그는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그 중에 하나가 『스펄전의 예화집(Spurgeon's Illustrative Anecdotes)에 나오는 ‘지켜주시는 기차의 기적(The Miracle of the Preserved Train)’이다.
 
스펄전 목사님이 여행 중 기차 사고를 간신히 면한 한 성도를 만났다. 그 성도가 "사고가 날 뻔했는데 하나님이 구해주셔서 기적을 체험했다"라고 하자, 스펄전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당신보다 더 큰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나는 아무런 사고의 위험조차 느끼지 못한 채 목적지까지 아주 평안하고 안전하게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사고에서 건짐 받는 것도 기적이지만, 사고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매 순간 지켜주시는 것이야말로 더 큰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확률이 아니라 사건이다
 
낡아서 사고 날 위험이 많은 기차와 사고 확률이 낮은 신형 기차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는 우리가 마주하는 형이하학적 현실(자본, 건강, 재능, 환경)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구형 기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좋게 포장’하는 것은 기만이다. 객관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 여행이 끝난 시점에서 개인에게 남는 것은 확률값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고가 났느냐, 나지 않았느냐’라는 단 하나의 결과뿐이다. 신형 기차도 사고 확률이 ‘0’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고 확률이 높든 낮든, 결과적으로 ‘사고 없음’이라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변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기적은 ‘비상사태의 해결’이 아니라 ‘상태의 보존’이다
 
우리는 흔히 기적을 ‘통계적 기댓값을 벗어난 행운’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기적의 정의는 ‘존재의 지속’으로 옮겨져야 한다. 낡은 기차를 타고도 무사히 한 역을 지나치는 것이 기적이다. 폐업이라는 극단적 형이하학적 손실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와 ‘신앙’이라는 가치가 절망, 자기혐오, 파멸로 이어지지 않고 보존되는 것, 그것이 기적이다.
 
이것은 Output의 공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Input × 효율(나의 능력 + 하나님의 붙드심) = Output
 

우리는 효율(Efficiency)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능력으로만 계산하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변수, 하나님의 붙드심(Divine Sustaining)이 포함되어 있다. 주일 성수를 지키다 폐업한 가게의 경우, 하나님의 붙드심은 당장의 물리적 매출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붙드심은 낡은 기차였음에도 완전히 전복되어 인생 자체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막고 계신 형이하학적 작용이다.
 
억울함의 신학: 시차, 용도, 그리고 재료
 
“누구는 1부 예배드리고 식당 문을 열어 잘 살고, 나는 주일학교 봉사하느라 식당 문을 닫고 결국 폐업했습니다. 억울합니다.”
 
이 억울함은 두 가지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첫째, Output에는 시차(Time Lag)가 있다. 세상의 경제학은 Input 즉시 Output이 나와야 효율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학의 경제학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쏟은 시간은 당장 식당 매출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Output은 예상치 못한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혹은 종착역에서 생명의 열매로 나타난다. 지금은 마이너스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마이너스를 통해 인생이라는 장부에 ‘영원히 삭지 않는 가치’를 기입하고 계실지 모른다.
 
둘째, 하나님은 재질(Material)이 아니라 용도(Utility)로 그릇을 선택하신다. 토기장이 비유의 본질은 금 그릇이냐 질그릇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담느냐에 있다. 금 그릇은 장식장에 모셔두기 좋지만, 배고픈 아이에게 밥을 담아주기엔 투박한 뚝배기가 훨씬 실용적일 때가 많다. 주일학교 봉사를 선택해 가게 문을 닫은 사람을, 하나님은 아이들의 생명을 담아내는 살아있는 식기로 쓰신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재질이 먼저 보이니 억울할 수밖에 없지만.
 
그 억울함 자체가 기적의 재료이다. 성경에서 가장 억울했던 인물들, 요셉과 욥도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 구형 기차를 타야 합니까?”라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 억울함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서운함조차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저 정말 속상합니다!”라고 정직하게 나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사실은 가장 뜨거운 신앙적 기적의 순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평생을 우울증이라는 정신적 고통과 통풍이라는 육체적 고통을 달고 살았다. 그 역시 억울한 사람이었다. 마치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었다.
 
구형 기차의 역설적 특권
 
신형 기차를 탄 사람에게 무사고는 당연한 기본값처럼 느껴진다. 그들에게 기적은 아주 희귀한 확률로만 경험된다. 그러나 낡은 기차를 탄 사람에게는 매 순간의 덜컹거림 속에서 한 역을 무사히 지나치는 것 자체가 ‘고밀도의 기적’이 된다.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의지하는 영적 근력은 신형 기차의 안락함 속에서는 좀처럼 길러지지 않는다. 구형 기차의 소음과 진동은 역설적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분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은 ‘낡은 기차를 새 기차로 바꿔달라’고 떼쓰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은 “이 낡은 기차로도 목적지까지 가게 하시는 운전사를 신뢰하겠다”는 태도이다. 금 그릇을 원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금 그릇이 아니면 당신을 토기장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순간, 기복이라는 괴물이 고개를 든다.
 
결국 ‘뿌린 대로 거두는 현실’은 기차의 종류와 투자한 시간이고, ‘일상의 기적’은 그 궤도 위에서 기차가 탈선하지 않도록 매 순간 바퀴를 붙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성공한 사람의 무사고나 실패한 사람의 생존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무게의 기적이다.
비록 식당 문은 닫혔을지 모르지만, 그날 주일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 아이들의 인생이라는 기차는 안전하게 달리고 있다. 낡은 기차에서 바퀴 하나를 떼어내어 그 기차가 멈춰버렸어도, 그 아이들의 기차는 보조 바퀴를 하나 더 달고 더 안전하게 달리고 있다.
 
신형 기차의 책임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1부 예배를 마치고 가게 문을 열은 분을 반드시 ‘믿음 없다’라고 할 수 없다. 그 분은 늘어난 매출로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그 이익으로 더 많은 선교사님의 사역을 도울 수도 있다.
 
그래서 신형 기차를 타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신형 기차를 타고, 자신의 배만 불릴 때 일어난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구형 기차를 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일반 은총을 베푸신다. 그 안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신형 기차를 탈 수도 있고 구형 기차를 탈 수도 있다.
 
힘든 인생이 싫다면 신형 기차를 타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맞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고 타야 한다. 힘든 인생이 되더라도, 구형 기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길이 더 가치가 있어 보인다면 구형 기차를 타고 가면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는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순간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결국 신형 기차를 타든, 구형 기차를 타든 기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차의 바퀴와 운전대를 잡고 계시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행함은 구원의 증거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1910년 파리 소르본 대학 연설 "공화국의 시민정신(Citizenship in a Republic)”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강한 자가 어떻게 비틀거리는지, 행동하는 자가 어디서 더 잘할 수 있었는지 지적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공로는 실제로 경기장에 있는 사람의 것이다.”
 
하나님은 트랙 위의 선수들을 구원하신다. 그 트랙 위의 선수가 좋은 신발을 신고 있던, 헤어진 신발을 신고 있던 개의치 않으신다. 좋은 신발을 신은 선수에게는 좋은 기록을 기대하시고, 해어진신발을 신고 있는 선수에게는 완주를 기대하신다.
 
그러나 관중석에 앉아, 자기 몸은 움직이지 않은 채 남의 경주만 평가하는 신앙은 경계하신다. 넘어지는 선수는 붙드실지언정, 경기장 밖에서 끝없이 비평만 하는 신앙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어렵다. 입술의 고백은 있는데,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일 수도 있다.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트랙에 올라가야할 이유다.
 
다시 기차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은 기차의 종류에는 큰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기차와 관계 없이 기차에서의 당신의 행동을 보신다. 그러나 그 행함은 내 의지라는 배터리로 돌리는 '자기 동력'이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넘겨드린 자에게 공급되는 '하나님의 전원'의 결과물이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행함이나, 불순한 동기로 쌓아 올린 행함은 결국 나라는 그릇의 재질을 뽐내려는 장식에 불과하지만, 참된 행함은 성령의 열매를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신형 기차를 타면 안되는 이유가 생긴다. 신형 기차를 타면 삶의 주도권을 넘겨드리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는 내 안의 엔진이 아닌, 성령님이 내 삶을 주도하고 계실 때만 비로소 가동되는 동력으로 열린다. 결국 성령님이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계신다는 것은,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모든 것으로 받아들여 나의 '자기 효율'을 내려놓았다는 의미이다. 낡은 기차는 이러한 과정이 쉽다.
 
나름 새로운 논리를 펼쳐 보았다. 그런데,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이글을 읽으면 칭찬하지 않으실 것 같다. 나는 공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