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 대한 오해
1811년, 분노한 노동자들이 몰래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다.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라고 불리게 된 사건이 시작되었다.
17세기, 영국의 산업은 숙련공들이 공장에 모여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제 수공업들이 대부분이었다. 1705년,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 대기압을 이용한 펌프식 증기기관을 발명하였고, 1769년,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실린더와 응축기를 분리하여 효율을 높였다. 이후 피스톤의 상하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하여 방직공장에서도 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증기기관의 지속적인 개량으로 인해 기계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고, 이는 수공업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숙련직을 고용하지 않고 소수의 비숙련공만 고용해도 수준 이상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저임금의 여성과 미성년자의 고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숙련공의 가치는 급락했다. 일부 장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공업자들은 단순 노동자로 전락하며 몰락해 버렸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은 매년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나가 일하게 되었고 잉여노동력이 생기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한 도시빈민들의 절박함을 이용해서 최소의 임금을 지급하며 긴 노동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자본가들은 엄청난 재산을 모아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지만, 노동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영국은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내는 부유층 남성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신귀족주의 체제였다. 따라서 투표권이 없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1799년, 영국 의회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단결금지법'을 제정해서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생산성은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빈부격차는 급속도로 커졌다. 투표권도 없고 집단행동도 금지된 상황이 지속되자, 쌓여만 갔던 불만은 결국 폭력으로 나타났다.
‘차라리 기계를 부숴버리자!’는 주장이 비정규직 섬유 노동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자, 밤에 몰래 기계를 고장내거나 아예 공장을 불태웠다. 이것이 러다이트 운동의 시작이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발행한 것은 당시 유럽에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불황과 노동법의 부재도 한몫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도화선이 된 것은 결국 기계의 등장이었다.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공포
200여 년 전 영국 노동자들이 휘둘렀던 망치는 단순히 기계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와 '인간 소외'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의 표현이었다. 시간이 흘러 망치는 사라졌지만, 기술의 진보 앞에 선 인간의 본능적인 저항은 시대를 관통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남은 공포는 오늘날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우리를 찾아왔다.
한국의 한 모 기업의 노동조합은 ‘단 한대의 로봇이라도 도입하면 총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부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어떤 형태이든지 인공지능의 도입은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주가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의 허락 없이 진행되는 일은 없었다.
미래학자인 최윤식 박사는 기술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칼뱅(Jean Calvin)의 말을 인용한다. ‘하나님이 정하시지 않은 것은 세상에 없으며 인류의 편익을 위해 허락하신 모든 지식은 '일반 은혜'이다.
과거의 인쇄기가 나오자 거룩한 성경을 기계로 찍어낸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인쇄기는 많은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쥐게 해 줬다.오늘날의 인공지능은 복음의 지경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현대판 '인쇄기'이지, '666'이나 사탄의 도구가 아니다.
과거 컴퓨터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세간에서는 이를 '666'이라 부르며 경계했다. 그러나 컴퓨터는 수많은 고급 일자리를 창출하며 인류 문명을 풍요롭게 했고, 이제는 복음 전파의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기술은 언제나 공포와 함께 등장하지만, 결국 그 기술을 선하게 다스려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인간의 지혜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늘날 많은 목회자가 노트북 앞에 앉아 워드 프로세서로 설교 원고를 치면서도, 인공지능이 성경 데이터를 정리해 주는 것에는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30여 년 전 컴퓨터와 인터넷이 처음 보급될 때 그것을 '666'이라 부르며 경계했던 세대가, 이제는 그 컴퓨터 없이는 목회를 지속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과거에 드럼이 교회에 들어올 때, 얼마나 거부감이 심했는 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그 드럼은 가장 뜨거운 찬양의 도구가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변화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기술의 실체'가 아니라, 단지 '생소함이 주는 위협'일뿐이다.실제로 컴퓨터는 숙련직을 없애기보다 더 많은 고부가가치 직종을 만들어냈고, 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드럼은 우리들이 기쁘게 찬양하는 악기가 되었다.
인공지능이 몰고 온 먹구름
과거의 기술 발전과는 달리, 인공지능은 ‘지속적인 대량 해고’라는 먹구름을 몰아 오고 있다. 이에 반해 새로운 직업의 탄생은 미미할 것이다. 과거의 변화하는 달리 인공지능은 거의 모든 직업을 대체할 수 있기에 더 큰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만약에 로봇세 도입을 통한 기본 소득이 도입되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면, 인간은 오히려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더 가치 있는 쪽에 쓸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인간의 자세와 태도
‘666’은 특정한 기술적 발명품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지배하려는 적그리스도의 통치 체제와 그에 대한 숭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666’은 도구의 이름이 아니라, 그 도구를 쥐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교만'인 셈이다.
최윤식 박사는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다스리라’는 명령은 자연 세계를 넘어 인류가 만든 문명과 기술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은 '벽돌 굽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로 자기 이름을 내려했던 인간의 '교만'이었음을 지적한다.
물론 인공지능의 발전이 ‘단순히 벽돌을 굽는 기술’이라는 개념을 넘어갈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신학적 대비도 준비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교회의 사명은 인공지능이라는 강력한 '현대의 벽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르게 다스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인공지능을 다루는 것은 21세기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새로운 형태의 순종인 셈이다.
교회가 인공지능을 적극 활용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더 본질적인 영성'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사무 행정, 시설 관리, 주방 보조 등 소모적인 잡무를 인공지능과 로봇에 맡길 때, 목회자와 성도는 기도와 말씀, 그리고 깨어진 영혼을 돌보는 인격적 관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다.
이제 교회는 인공지능을 적이 아닌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신학자들도 신학적 데이터를 정리하는 인공지능의 보조를 받아야 한다.목회자는 인공지능이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성령님의 뜨거운 감동을 입히는 창조적 사역으로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교회는 담장 안에서 인공지능 사용 여부를 두고 논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이 인공지능을 선하게 사용하도록 영적인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 기술이 비인간화와 소외를 낳지 않도록 성경적 가치관을 제시하고,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인류를 삼키는 재앙이 아니라 노아의 방주처럼 생명을 구하는 수단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진정한 사명이다.
최윤식 박사의 통찰처럼, 바벨탑 사건의 본질은 '벽돌'이라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 이름을 내려했던 인간의 '교만'에 있다. 벽돌은 죄가 없다. 기술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그 벽돌로 바벨탑을 쌓을 것인지,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것인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지금도 지켜보고 계신다. 교회가 사회에 인공지능에 대한 가장 옳은 해법을 던져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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