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에(踏み絵) 그리고 신사참배 : 생존 본능을 거스르는 신앙의 무게
신앙은 착각이나 도피가 아니다: 흔히 종교를 '나약한 인간이 고난을 피하기 위해 만든 안식처라고 말하지만, 진짜 기독교의 진실은 고난이 다가올 때 그것을 피하는 환상이 아니다.
바울은 회심 이후 고난이 비켜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 맞고 갇히는 구체적인 고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놀라운 점은 고난이 깊어질수록 그의 서신서들은 더욱 정교하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참된 신앙은 위기 앞에서 감정적 광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직시하며 가장 고차원적인 영적 논리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생존 본능의 위대한 거부 –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당시, 극심한 공포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Yes”라고 답한 학생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즉사한 학생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학생도 있었다.
분자생물학과 진화론의 관점에서 생명체의 최우선 과제는 ‘생존과 유전자 보존’이다. 위기 상황에서는 생존 본능이 뇌를 지배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 순간 “Yes”라고 답한 학생들의 선택은, 인간이 단순히 물질적으로 진화한 고등 동물이 아님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물질세계의 가장 강력한 법칙인 ‘생존 본능’을 영혼의 의지로 거부한 이 사건은, 인간에게 물리적 뇌를 넘어서는 ‘영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로 남아 있다.
연약함이라는 인간의 현실 (후미에, 踏み絵)
17세기 일본 에도 막부는 가톨릭 신자(키리시탄)들을 색출하기 위해 예수나 마리아의 성화를 땅에 두고 발로 밟게 했다. 이를 '후미에'라고 한다.
성화를 밟지 않으면 잔혹한 고문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성화를 밟았던 수많은 나약한 인간들. 우리는 그들의 연약함을 쉽게 정죄할 수 있는가?
이 사건은 “형식(발로 밟는 행위)과 마음(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반드시 일치해야만 하는가?" 라는 무거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엔도 슈사쿠는 그의 소설 《침묵》에서 예수의 형상이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의 고통과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라고 속삭이던 장면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역사적 거울 - 신사참배와 주기철 목사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아픈 장면은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이다. 생존과 교단의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닌 국가 의식'이라 타협했던 대다수의 목회자들과, 이를 거부하고 옥사한 주기철 목사님의 서슬 퍼런 순교가 대조된다.
그 때 목회자들이 한 말은 이렇다.
“우리가 다 순교하면 누가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옥한흠 목사님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신사참배 죄책을 눈물로 회개했다. 이 과거의 타협은 현재 한국 교회에 아픈 영적 상흔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때 모두가 순교했다면 기독교는 망했을까?"
언뜻 생각하면 지도자가 다 사라진 교회는 없어지고 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어서 신자들이 사라져 갈 때 기독교가 쇠퇴했나 아니면 오히려 신자가 늘어났나?
그 때의 타협으로 살아남은 교회가 오늘날 물질주의와 기복주의로 영적 파산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만약 그때 거의 모든 목회자가 순교했다면, 외형적인 교세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을지언정 순전하고 강력한 복음의 능력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영적 번성을 이루었을 것이다. 씨앗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결론: 우리는 정말 천국을 바라고 있는가? - 보화가 묻힌 땅
우리는 정말 '하늘 나라'를 갈망하는가, 아니면 이 땅에서도 탐욕스럽게 잘 살고 누릴 것 다 누리다가 '보험'처럼 천국까지 덤으로 얻기를 바라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 우리 앞에 후미에가 놓인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현세의 안락에 목매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성화를 밟을 것이다.
정말로 천국의 가치를 발견한 자는, 이 땅의 소유가 아깝지 않다.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보화가 묻힌 땅을 사는 법이다(마태 13:44). 캐시 번할과 주기철 목사는 그 보화를 보았기에 생존 본능마저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다.
고난 속에서 오히려 가장 찬란하고 논리적인 진실을 향해 나아갔던 바울처럼, 우리 역시 현세의 안락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하늘 소망이라는 '진실' 위에 삶을 던져야 한다.
하지만,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래서 더욱 두렵고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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