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는 의무일까? 신약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
문득 내 신앙의 재정 장부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나는 진짜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헌금을 하고 있는가? 그때 '십일조'라는 단어가 떠 올랐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의 통로인 십일조.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교회에서 그것은 전혀 다른 두 얼굴을 한 채 우리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캐나다로 이민 온 이후에, 수입이 형편없어졌다.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늘 적자였다. 십일조 낼 돈이 없었다. 하지만 적자가 나는 달에도 늘 빛을 내서 십일조를 냈다. 빛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조금 수입이 있는 달은 십일조를 안 내면 적자를 면했지만, 결국 십일조를 내면 적자가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는 무조건 십일조를 드렸고 그 행동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그 것이 정말로 내 마음에 우러난 동기인지, 아니면 의무감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마, 두 마음이 섞여 있는 듯하다.
십일조의 기원
십일조는 "이 모든 토지소산과 가축이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주권의 고백이었다. 즉, 10분의 1을 드림으로써 나머지 10분의 9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대표성의 원리'가 있다.
구약에 십일조는 여러 번 등장한다. 먼저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살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전쟁 승리 전리품의 10분의 1을 드린다. (창세기 14장 20절)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벧엘에서 도망치던 중,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다. (창세기 28장 22절)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에도 십일조에 대해서 계속 언급된다.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레위기 27장 30절)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민수기 18장 21절)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명기 14장 22절)
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인 동시에 신정 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성전 맡은 일을 하던 레위인들의 생계를 보장했고, 궁극적으로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같은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국가 복지 기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구약의 마지막 책이 말라기에도 나온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장 8~10절)
아마도 이 구절은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성경 구절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그리고 십일조는 그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신약에서의 십일조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진 종교 지도자들을 무섭게 질책하셨다. 십일조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 안에 담겨야 할 정의, 긍휼 그리고 믿음의 본질이 훨씬 중요함을 선언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태복음 23:23)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라는 구절을 십일조에 대한 의무로 해석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십자가 사건 이전이었다. 즉, 구약의 율법 체계와 성전 제사 제도가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던 '유대교 사회'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구약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이었고, 예수님은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그 정신은 짓밟고 있던 그들의 '위선'을 구약 율법의 기준으로 책망하신 것이다. 유대인인 그들이 성전 체제 안에서 십일조를 내는 것은 당시로선 당연한 의무였기에 "그것도 하되, 본질을 버리지 마라"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논리를 그대로 현대 우리에게 적용하면 아주 심각한 모순들이 생겨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행동들도 언급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는 것, 옷술을 길게 늘이는 것 등도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였다.
만약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를 문자 그대로 현대 이방인 교회에 적용해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도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켜야 하며,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십일조라는 율법의 한 조항만 쏙 빼서 "이건 예수님이 하라셨다" 하고, 나머지 유대인의 율법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폐하셨다"라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유리한 것만 골라 취하는 '체리 피킹(Cherry-picking)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인류 역사가 완벽하게 변했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로마서 10:4)이 되셨고,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에베소서 2:15).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율법적 지침을 주신 것들은, 십자가 사건 이후 성령 시대가 열리고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된 웅장한 자유의 법으로 재해석되었다.
결국 이 구절을 들이대며 십일조를 의무화하는 것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위선과 인색함'을 대단히 꾸짖으신 본문의 핵심을 완전히 뒤틀어, 오히려 성도들에게 종교적 의무를 지우는 도구로 역이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일조라는 형식을 칭찬하신 게 아니라, 그 형식을 완벽히 갖추고도 마음에 사랑이 없는 종교인들의 추악함을 고발하신 것이다.
또한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초기 교회는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고 십일조와 안식일과 같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최초의 교회 총회에서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이방인들에게 종교적 의무를 짐 지우지 말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행전 15:10)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사도행전 15:28)
여기서 '요긴한 것'이란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멀리하라는 최소한의 윤리적 지침이었으며, 십일조나 할례 같은 구약의 의무 체계는 모두 제외되었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자유를 버리고 다시 구약의 율법 조항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을 향해 강하게 경고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로새서 2:14~16)
앞서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들에게 "아무 짐도 지우지 말자"라고 결론 내릴 때, 만약 마태복음 23장 23절이 '예수님이 이방인에게도 명령하신 규례'였다면 사도들이 감히 십일조를 이방인의 의무에서 제외할 수 있었을까?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뜻이 '율법의 문자적 구속'이 아니라 '정의와 긍휼의 성취'임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말씀을 기준으로 본다면, 십일조라는 '제도적 의무'를 이방인 교회에 명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멍에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얻었음을 선언한다.
다만, 그 자유를 얻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10분의 1이라는 정량적 계산이 아니라, "내 모든 삶과 소유가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 속에 인색함 없이 기쁨으로 공동체와 이웃을 섬기는 '더 높은 차원의 자발적 헌금이다.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
십일조를 헌금하면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 우리는 매달 정해진 액수를 헌금 봉투에 넣으며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것으로 내 의무는 다했다’는 면죄부, 연말정산 때 돌아올 세액 공제의 영수증, 그리고 교회 주보나 봉투 이름칸에 박힐 내 이름 석 자가 주는 평판의 평안이다. 십일조라는 견고한 제도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인색함을 아주 신실한 종교적 외투로 가려주는 완벽한 안전장치로 둔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외투를 벗겨내는 순간, 또 다른 얼굴인 ‘종교 비즈니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만약 오늘 당장 십일조 의무가 사라지고, 세액 공제 혜택도 없어지며, 헌금 봉투에서 이름칸마저 지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오직 ‘당신의 기쁜 마음 수준만큼 내라’는 날것의 복음만 남는다면, 과연 내 지갑은 주님 앞에서 부들부들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제도와 평판이 사라진 가상의 광야에 서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짜 내 믿음의 수위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교회 역시 이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십일조 안 내도 된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당장 교회의 거대한 시스템이 마주할 미래는 복음의 자유함이 아니라 ‘재정적 파산’ 임을 목회자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마치 대형 NGO 단체가 후원금을 받아 건물 유지비와 직원 월급으로 대부분을 쓰고 정작 고유의 목적인 구제에는 남은 소액만 쓰는 ‘오버헤드(Overhead)의 덫’에 걸린 것처럼, 현대 교회도 건물과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조해야만 굴러가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안수집사, 권사, 장로 선출의 기본 조건이 십일조 생활을 하는가 임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세팅이 잘못된 것이다.
예상되는 질문과 나의 답변
Q: 복음의 자유를 부정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목회자들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 십일조 제도가 무너져 교회가 파산하면 당장 신학만 공부하고 평생 목회만 해온 목사들은 길거리로 나앉으라는 말인가? 일하는 목회자가 되라고 하지만 당장 나이 든 목사가 세상 밖으로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A: 이 글은 특정 목사님 개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시스템'을 아쉬워하는 글이다. 바울 사도가 천막을 짓는 노동을 병행했던 것처럼, 일하는 목회자 시스템은 목회자를 쫓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재정적 노예 상태'로부터 목회자를 독립시켜 복음의 선포를 더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대안이다. 교회의 재정 상태에 목줄이 잡혀 성도 눈치를 보며 십일조를 강요해야 하는 지금의 구조가 오히려 목회자의 영광을 가리고 있음을 함께 아파해야 한다.
Q: 이 글에서 주장하는 대로 교회가 헌금의 대부분을 유지비, 즉 오버헤드로 쓴다고 치자. 하지만 소액이라도 있으니 선교사도 파송하고, 지역 구제도 하고, 다음 세대 교육 프로그램도 돌리는 것이다. 십일조가 사라져 재정이 토막 나면 그 사역들마저 완전히 중단된다. 사역을 확장하려면 오히려 성도들이 '십이조, 십삼조'를 내야 흘러갈 돈이 생기지 않겠는가?
A: 사역을 늘리기 위해 성도에게 십이조, 십삼조를 요구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더 많이 붓자는 임시방편일 될 뿐이다. 인간은 재정이 생기면 더 큰 건물, 더 많은 목회자 고용, 목회자의 안정된 삶에 먼저 투자한다. 진정한 대안은 성도에게 짐을 더 지우는 것이 아니라, 독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주중에는 작은 사무실만 유지하고, 주일에는 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드리는 교회가 제법 많다. 목회자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 아예 길거리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 오버헤드를 줄일 수만 있다면,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드린 헌금만으로도 과거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강조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외부 사역과 구제를 해낼 수 있다.
Q: 목회자들을 종교 비즈니스 업자처럼 매도하지 말라. 실제로 많은 목회자는 부임할 때나 교회가 어려울 때 스스로 '십의 2조', '십의 3조'를 해가며 교회를 눈물로 지키고 있다. 그런 목회자들의 희생까지 도맡아 폄하하는 것은 억울하다.
A: 목회자가 십의 2조, 십의 3조를 내는 이유는 율법이 강제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는 자발적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십일조라는 율법적 의무와 규칙'이 아니라, 그런 목회자들처럼 교회를 사랑하게 만드는 '복음의 감격'이다. 목회자의 그 고귀한 자발적 헌신을 왜 성도들에게는 적용하지 못하고 '규율'로 묶어두려 하는가?
종교 비즈니스와 진정한 교회
문득 건물이 없어서 정작 재정이 넘쳐난다는 어느 목사님의 기분 좋은 역설이 떠오른다. “성도가 교회다”라는 명제를 입버릇처럼 외치면서도, 목사님들은 좋은 건물을 짓고 봉헌하면 뿌듯해한다. 건물은 꼭 필요한 것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건물과 화려한 인프라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외치며, 그 건물이 주는 장점과 사역 전념이라는 개념을 놓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매주 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목회자가 주중에 세상 속으로 나가 텐트를 만들며 일하는 ‘불편한 주체’가 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결정이다. 그렇기에 관습대로, 좋은 건물과 전문직 목회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다가올 미래에 진짜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제도적 강요가 없어도 자발적인 사랑으로 공간과 공동체를 유지해 낼 것이고, 종교 비즈니스에 불과했던 곳들은 어느 한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붕괴가 아니라, 인간이 쌓아 올린 바벨탑이 무너지고 예수님이 세우신 진짜 에클레시아만 남는 거룩한 정화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정직한 질문 하나가 고개를 든다. 나의 드림은 과연 율법의 멍에인가, 아니면 은혜에 압도된 자의 기쁜 드림인가. 내 지갑의 주권을 누구에게 쥐여주고 있는지, 거울 속 내 민낯은 아직도 헤매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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