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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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에 던지는 질문 – 성비 불균형과 전공 불균형

캐나다 제이슨 2026. 6. 20. 09:13

현대 교회에 던지는 질문 성비 불균형과 전공 불균형

 

창밖으로 쉬지 않고 비가 내린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빗소리를 배경 삼아, 인간의 뇌와 영성, 그리고 현대 교회가 마주한 비극에 대해 긴 생각에 잠겼다. 과학의 차가운 메커니즘과 신학의 뜨거운 실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박제된 교리가 아닌 살아있는 진실의 흔적을 고민했다.

 

뇌과학과 진화가 바라본 종교: 보상 회로와 적응적 착각

 

뇌과학과 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정서는 철저히 생물학적인 화학반응이다.아름다운 예술이나 숭고한 이타주의를 마주할 때 느끼는 거대한 '감동' 역시 예외는 아니다. 뇌과학은 인간이 감동의 최고조에 달할 때 측좌핵(Nucleus Accumbens)에서 도파민이 폭발적으로 분출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심지어 이 도파민을 분해하는 효소를 조절하는 COMT(catechol-O-methyltransferase) 유전자나, 공감 능력을 좌우하는 옥시토신 수용체(OXTR) 유전자의 변이에 따라 인간은 유전적으로 감동을 느끼는 역치가 다르게 태어난다.

 

이러한 인지과학적 메커니즘을 사회적 단위로 확장하면 진화심리학이 말하는 종교의 기원에 닿는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극단적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인간의 '의도 탐지 시스템(HADD= Hyperactive Agency Detection Device)'이 오작동하여 만들어낸 부산물이자, 스스로를 복제하는 바이러스 같은 문화적 유전자 밈(meme)으로 취급한다. , 종교는 일종의 '집단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David Sloan Wilson)의 분석처럼, 이 착각은 인류 생존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적응적 착각'이었다. 보이지 않는 신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믿음은 거대 사회에서 무임승차자와 배신자를 가려내고 공동체의 결속력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사회적 접착제였다. 결국 과학의 시선에서 종교란, 인간의 뇌가 진화 과정에서 공동체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 선택한 가장 정교하고 기능적인 도구인 셈이다.

 

이어령의 역설: 우물 자체가 곧 증거라는 정황

 

하지만 평생을 언어와 기호, 문명의 허구를 감별해 온 비평가 이어령은 말년에 이 과학적 메커니즘을 완전히 뒤집는 날카로운 반론을 제기했다. 그가 기독교의 진실을 변증 하기 위해 꺼내 든 카드는 법정의 '정황적 증거'였다.

 

이 교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갈망하는 '영적 목마름'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주목했다. 이 세상에 물이 없다면 목마름이라는 감각 자체가 진화할 수 없었을 것이고, 실재하는 양식이 없다면 배고픔이라는 고통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수만 년 동안 물질세계 너머의 초월자를 갈망해 온 이 본능은 어디서 왔는가. 진짜 실체가 없다면 가짜를 향한 갈망이 유전자 지도에 새겨질 리 없다. 인간이 만든 지성이 도달한 이성의 끝방에서 마주하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신비, 그것이 바로 신이 진화라는 프로세스를 통해 인간의 뇌에 심어둔 영적 안테나의 정황 증거라는 뜻이다.

 

인류는 바보가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영악하게 진화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착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박해를 당하고 목숨까지 잃었던 성경 속의 인물들을 제외하더라도,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했던 천재들 뉴턴(Isaac Newton), 파스칼(Blaise Pascal), 데카르트(René Descartes)와 같은 이들이 모두 그 '집단 착각'에 속아 넘어가 평생을 바쳤을까?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막스 프랑크(Max Planck), 인간 게놈 프로젝트 총책임자였던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S. Collins), 빅뱅이론을 창시한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 등등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과학자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심지어 평생 인격신을 거부했던 아인슈타인(Einstein)조차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며 우주의 정교한 질서 뒤에 이성적 원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이성의 끝에서 설명 불가능한 질서를 마주한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공통적으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정황이다.

 

사도 바울의 생애가 증명하는 객관적 실재

 

집단적 기억 왜곡이나 미화라는 무신론적 비판이 결코 통하지 않는 가장 강력한 단독 정황은 바로 사도 바울이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바울이라는 지성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거대하고 압도적인 '개인적 체험'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못한다.

 

인간은 이익이 없을 때 인생 전체를 던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유대교 엘리트였고 로마 시민권자였으며 기득권의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 이후 그는 명예와 안전을 모두 잃고 평생 매질과 돌맞음,감옥 수감과 참수형의 길을 걸었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환각이나 정신질환이었다면, 그의 편지에 흐르는 소름 끼치도록 정교한 논리와 30년간 흔들리지 않은 일관성을 설명할 수 없다. 증오하던 대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배설물처럼 버린 바울의 생애는, 내부의 착각이 아니라 외부에 실재하는 어떤 압도적인 '부활의 실재'가 그의 정신을 강타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인과관계의 결과물이다.

 

현대 교회의 비극: 감성 장사와 확신 시장

 

그렇다면 왜 현대의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는가. 결론은 참담하다. 기독교라는 진리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인 대부분의 교회가 틀렸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기득권을 버렸으나, 현대의 교회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쓴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표면적으로만 영성과 진리를 다루는 곳이 되었고, 실제로는 일종의 '감성 장사'를 하는 '확신 시장'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팍팍한 생존의 현실, 과학과 신학의 충돌 속에서 치열하게 질문하지만, 교회는 그 지성적 질문을 "믿음이 부족하다"며 억압한다.

 

예측(이론)과 데이터(현실)가 다르면 이론을 수정해야 하지만, 오작동하는 교조주의는 현실 데이터를 악마화하며 오류 수정(디버깅)을 거부한다. 교회 안에서 스펙과 세속적 서열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경쟁 사회를 마주한 청년들은, 본질을 잃어버린 위선에 환멸을 느끼며 발길을 돌리고 있다.

 

문과적 오작동의 비극과 종합학문으로서의 신학

 

어쩌면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문과적 사고'의 극단적 오작동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흔히 이공계 출신들이 사회 규칙을 잘 지키고 모범 시민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들은 볼트 하나, 코드 한 줄만 잘못되어도 시스템이 터지는 것을 매일 겪으며, 자연 법칙과 데이터 앞에 정직해야 함을 몸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 목회 생태계는 문과적 수사학과 감성적 서사에 치우쳐 있다. 데이터가 없어도 화려한 말로 세계를 지어내고, 정답을 정해놓고 논리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사실 매우 이공계적이다. 바울은 관념적 말싸움을 한 게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 500명이 넘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며 증거 기반의 팩트 위에서 논리를 펼쳤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교에는 반드시 자연과학과 공학이 커리큘럼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학은 뜬구름 잡는 문과 학문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인과와 인간의 인지 체계를 모두 다루는 '종합학문'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과학적 사고와 공학적 정직함을 훈련받아야 비로소 교회의 시스템 오류를 인지하고 디버깅할 수 있다.

 

질문과 답변

 

Q: 신앙은 '논리나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모든 것을 과학 데이터와 인과관계로만 재단하려는 태도는 인간의 이성을 신앙보다 우위에 두는 오만 아닌가?

 

A: 오히려 사실(Fact)을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유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신앙은 뜬구름 잡는 관념적 확신이나 맹목적 세뇌가 아니었다. 바울은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을 향해 부활의 증인이 500명이 넘으니 직접 가서 확인해 보라(고린도전서 15)’며 철저히 '증거 기반(Evidence-based)'의 팩트를 제시했다.

 

기독교의 본질은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압도적인 '사건'과 그로 인한 삶의 '열매(Output)'로 증명하는 매우 이공계적이고 정직함이다. 사실과 데이터를 마주하기 두려워하며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교조주의야말로,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교리의 성벽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오만이다.

 

Q: 종교를 진화의 부산물이자 '집단 착각(HADD)'으로 해석하는 무신론적 뇌과학 이론을 신학에 들여오는 것은 기독교의 초연성(초자연적 계시)을 훼손하고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 아닌가?

 

A: 뇌과학이 밝혀낸 메커니즘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정교한 설계 정황'을 증명한다. 이어령 교수님이 간파했듯, 존재하지 않는 가짜 영원을 향해 온 인류가 수만 년 동안 목말라하는 유전적 설정 자체가 모순이다. 실재하는 물이 없다면 목마름이란 감각도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뇌과학이 인간의 뇌 속에서 도파민 보상 회로나 HADD(과활성화된 의도 탐지 장치) 같은 종교적 메커니즘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무신론자들의 말대로 '착각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 빚어내고 소통하기 위해 진화라는 프로세스를 통해 인간의 하드웨어에 장착해 둔 '정밀한 영적 안테나'의 정황 증거로 해석해야 한다. 과학은 '어떻게(Mechanism)'를 설명할 뿐, 그 너머의 '(Meaning)'를 읽어내는 것이 진정한 신학의 역할이다.

 

Q: 신학대학원에 자연과학과 공학을 필수로 넣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영성과 성도를 위로하는 인문학적 소양, 즉 문과적 자질이다. 왜 신학을 잡탕으로 만드려고 하는가?"

 

A: 에러(오류)를 인지하지 못하고 디버깅(수정)을 거부하는 시스템은 반드시 안에서부터 썩어 무너지기 때문이다. 지금 청년들이 교회를 대거 떠나고 있다는 명백한 데이터가 눈앞에 있음에도, 현재의 문과적·수사학적 목회 생태계는 이를 말세라 그렇다’, ‘영적 전쟁이다라며 화려한 말로 현실을 덮어버린다.

 

공학자는 예측과 실제 데이터가 다르면 자신의 예측과 이론을 수정하지만, 오작동하는 교조주의는 현실 데이터를 악마화한다. 신학은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적 문과 학문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인과와 인간의 인지 체계를 모두 아우르는 종합학문이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공학적 정직함과 과학적 사고를 훈련받아야만, 교회의 시스템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디버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Q: 교회가 '감성 장사'를 한다는 말은 심하게 지나치다. 교회가 제공하는 위로와 뜨거운 예배의 감동은 성령의 역사이다. 이를 도파민 분출이나 확신 시장이라는 세속적 단어로 비하하는 것은 모독이다.

 

A: 메시지와 삶이 불일치하는 위선, 질문을 억압하는 교조주의가 바로 진리를 '비즈니스'로 타락시킨 주범이다. 기독교의 본질이 틀린 것이 아니라, 교회가 틀렸다는 것은 청년들이 증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가치는 '자기 비움(Kenosis)' '낮아짐'이었고,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모든 기득권을 배설물처럼 버렸다.

 

그러나 현대 교회가 청년들의 합리적인 지성적 질문(과학과 신학의 충돌, 현실의 불평등 등) "믿음이 없다"라며 억압하고, 뒤에서는 세속적인 스펙과 서열, 기득권 세습을 쫓는다면 그것이 바로 영성을 도구화한 '감성 장사'이다. 성도들의 감정을 자극해 종교적 확신을 판매하면서 정작 삶의 열매(Output)와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다. 교회에는 왜 상대적으로 이공계 출신이 적고 또 상대적으로 남자가 적은 지 고민해 보기를 바란다.

 

본질 사수와 진화된 해석의 필요성

 

시대가 변하고 과학 이론이 바뀌듯, 신학의 해석 역시 끊임없이 업데이트되어야 한다. 문자가 기록된 수천 년 전의 고대 근동 아시아의 과학관에 갇혀 현대의 뇌과학과 우주론을 부정하는 것은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두는 짓이다.

 

우리가 사수해야 할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자기 비움(Kenosis)' '낮아짐', 그리고 바울이 목격한 '압도적 실재'이지, 인간이 만든 교조적인 성벽이 아니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품고, 뇌의 도파민 작용을 인정하면서도, 그 정교한 메커니즘을 설계하고 인간에게 영원을 심어둔 초월자의 거대한 서사를 읽어내는 '더욱 발전된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진리는 변하지 않으나, 그 진리를 설명하는 언어는 시대의 지성과 호흡해야 한다. 비 내리는 오늘, 이공계적 담백함과 정직한 회의주의가 타락한 종교의 수사학을 치료할 가장 시급한 백신임을 깊이 절감되는 이유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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