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악마들
내 블로그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 다음 메인 페이지에도 자주 소개가 되기도 했었다. 주제가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캐나다로 이민 오면서 삶 속에 지쳐갔고 블로그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블로그가 폐쇄되고 티스토리로 강제 이동되면서 내 블로그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주제가 바뀌었다. 나의 최대 관심사는 신학과 과학의 융합이었다. 그 근본적인 사유는 내가 느꼈었던 개인적인 갈등과 그와 유사한 갈등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가는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글을 쓰고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블로그가 조금씩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블로그 통계가 이상했다. 조회수가 높지 않았고 검색 유입의 비율이 매우 낮았다. 트래픽을 유도하기 위해서 아내가 아팠을 때 모아두었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건강 시리즈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드 오션 시장에서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의 패턴이 보였다. 감성적인 글들이나 일부 유명 구절 성경 말씀 묵상은 잠깐 조회수가 높아졌다가 내려갔다. 하지만 깊은 지적 사색을 요구하는 글들은 거의 조회가 되지 않았다.
독자보다 작가가 많은 시대
내 블로그의 누적 방문자 수에 비하면 지금의 하루 조회수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감성적인 글이나 대중적인 건강 상식을 올리면 반짝 트래픽이 생기지만, 다시 이성적이고 무거운 본질을 꺼내 들면 수치는 이내 바닥을 친다.
내 블로그의 이러한 현상은 검색을 통한 유입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블로그 주소를 저장했다가 가끔 찾아와서 새로 올라온 글들 중에서 읽고 싶은 글을 찾아 읽는 일시적인 클릭에 의존한 결과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인터넷과 워드프로세서의 등장으로 자료 조사는 편해졌고 편집은 쉬워졌다. 여기에 인공지능까지 가세하면서 이제는 사소한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고생하지 않고도 그럴듯한 문장을 찍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글쓰기의 장벽이 무너지자 너도나도 창작자를 자처한다. 이제 세상은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은 기이한 구조로 넘어가고 있다.
이 안에서 비유명인이 생존하는 방식은 대개 품앗이다. 내 글에 와달라며 타인의 글에 부지런히 흔적을 남기는 의리성 트래픽이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나만의 신념이 담긴 묵직한 사유만 고집한 대가는 냉정하다. 지속적인 검색어로 연결되지 못하는 깊은 주제들은 수요 자체가 적다. 내가 검색하면 상위에 잘 걸리지만, 애초에 그 단어를 검색하는 사람 자체가 없다. 시장의 이동 인구 자체가 없는 한적한 골목길에 꽤 쓸만한 물건을 진열해 놓은 꼴이다.
결국 대중은 메시지보다 메신저의 이름값을 소비한다. 대중은 유명인의 글이라면 B급이나 C급의 글이라도 읽는다. 그리고 의외로 후한 평가를 준다. 문제는 그들의 D급 심지어 F급의 글들도 읽는다. 하지만 비유명인의 A급 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스스로 좋은 글인지 판단할 여유가 없기에 이미 검증된 권위라는 보증수표를 따라간다.
도파민에 중독된 현대인들
이 냉혹한 텍스트의 종말 앞에서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있다면"이라는 낭만적인 위로는 무력하다. 이제는 희귀하다고 해서 소중하게 보관되는 시대가 아니다. 트래픽의 선택을 받지 못해 희귀해진 글은 알고리즘의 거대한 타임라인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인공지능에게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명작 고전 100선을 뽑아달라고 다그쳐봐야, 대부분의 현대인은 단 한 권도 읽지 않고 죽는다.
대중이 이성적인 사유의 글을 외면하는 것은 단순히 무지해서가 아니다. 인간은 영악하다. 한 가지 자극에 질리면 뇌를 식혀줄 또 다른 형태의 도파민 분출제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찾아 움직인다. 단 일 분의 쇼츠 영상에 지루함을 느끼면 십 초짜리 자극으로 옮겨가듯, 텍스트의 세계에서도 사색적인 척 위장한 새로운 도파민 글들이 기가 막히게 그 자리를 대체한다. 비슷한 글이 쌓이면 새로운 패턴의 도파민 분출 글들이 계속해서 태어난다. 더 정교하게 설계된 가짜들이 판을 치는 판국에, 뇌에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 깊은 글이 살아남을 재간은 없다.
악마들의 현대적 전략
도대체 왜 그럴까? 결국 이 모든 것은 ‘영적 전쟁이라는 거대한 싸움터의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짧은 예배를 드리고 나면 바로 주제는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똑같이 치열하게 노동하고 똑같이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이면서도, 사람들은 날씨와 자녀, 부동산과 주식 이야기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게 소비할 수 있는 일상적 도파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신학과 과학의 접점이라는 무거운 본질을 꺼내는 순간, 분위기는 급랭한다. 다들 핸드폰을 보거나 화장실로 자리를 피하고, 서둘러 이야기를 끝낸 뒤 집에 가자고 재촉한다.
이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현대 악마들의 대단히 똑똑하고 정교한 전략이 숨어 있다.
과거의 악마들은 인간에게 신이 없다고 무식하게 우겼지만, 현대의 악마들은 인간을 정신없이 바쁘고 편리하게 만드는 방식을 쓴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존재의 근원을 묻는 '왜(Why)'라는 질문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다. 대신 당장 눈앞의 문제를 '어떻게(How)' 해결할지, 돈을 어떻게 더 벌고 기술을 어떻게 더 편리하게 쓸지만 생각하게 만든다. 기술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사유 능력을 마비시키는 악마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악마는 인간을 무신론자로 만들지 않는다. 다만 인간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신을 내 부동산과 주식과 자녀를 잘되게 해주는 유용한 보조 수단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창조주의 근원적인 섭리를 들여다보는 대화가 시작될 때 사람들이 불편해하며 도망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중심적인 삶의 체계를 뒤흔드는 본질을 마주할 정신적 근육이 이미 퇴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근원적인 질문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는 똑똑한 악마들의 전략은 지금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그 거대한 도파민 제국을 향해 허공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소리를 꾹꾹 눌러쓰는 일은 참으로 고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다시 펜을 드는 것은, 저 거대한 알고리즘에 영혼을 저당 잡히지 않은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나 역시 그냥 내 생각을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싶은 그런 못난이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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