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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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살 것처럼 사는 인간, 그리고 기독교라는 방주의 딜레마

캐나다 제이슨 2026. 7. 6. 08:48

천년을 살 것처럼 사는 인간, 그리고 기독교라는 방주의 딜레마

 

블로그를 다시 시작한 지 4달이 다 되어 간다. 그 동안 써 놓았던 많은 글들을 하나씩 올려가면서 저녁 시간을 보낸다. 조회수 한자리를 넘기지 못하는 글들을 바라보면 종종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문득 인기 블로그들이 쓴 글들의 제목을 본다. 맛집 정보, 여행지 정보, 생활 정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편파적인 건강 정보등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리고 제목들은 왜 이렇게 자극적인지 모르겠다.

 

인생은 짧고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알면서도, 왜 대중은 이토록 사소하고 말초적인 자극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조선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일찍이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살 것처럼 사는 사람들아"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물론 대중이 맛집과 여행을 검색하는 것은 죽음으로부터의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짧음을 무의식적으로 직감했기에 "주어진 시간 동안 가장 밀도 높게 생명의 에너지를 연소시키겠다"는 생물학적 생존 본능인 것도 있다. 긍정적인 사람이 장수한다는 사실이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 해준다.

 

하지만 중독적 도파민 분출과 긍정적인 삶은 결이 다르다.

 

공포관리 이론과 확증편향

 

그렇기 때문에 그 해답을 심리학과 뇌과학에서 찾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눈물겨운 취약성과 마주하게 된다. 심리학의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사라진다는 실존적 공포를 마주했을 때 이를 외면하기 위한 강력한 정신적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를 작동시킨다. 거대한 실존적 질문은 뇌를 피로하게 만들지만, 오늘 당장 갈 맛집을 찾고 연예인 뉴스를 소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공포를 시야에서 가려주는 완벽한 가림막이 된다. 여기에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자극에만 도파민(dopamine)을 분출하도록 설계된 원시적인 진화심리학적 한계가 더해지면서, 대중은 인생의 의미보다 눈앞의 달콤한 통제감에 집착하게 된다.

 

더 큰 비극은 대부분의 어른이 자신이 그런 무의식적 방어 기제에 갇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정신적 면역 체계는 스스로도 깜빡 속아 넘어가야만 제 기능을 발휘하기에, 어른들의 뇌는 이미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성벽이 쌓아 올려져 있다. 이 완고한 어른들을 계몽하겠다며 방송에서 명품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보아야, 정작 채널을 고정하는 것은 이미 메타인지(meta-cognition)가 높아 '안 봐도 될 사람'들뿐이다. 진짜 봐야 할 사람들은 0.1초 만에 채널을 바꿔버리는 이 희한하고도 씁쓸한 광경이 현대 미디어의 한계다.

 

그렇기에 이 무의식의 굴레를 깨기 위해서는 아직 뇌의 유연성이 남아 있는 고등학교 시절, 사회나 윤리 시간에 이 진실을 필수적으로 학습해야만 한다. 청소년기부터 "인간은 공포를 잊기 위해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배운다면, 사회 전체의 인지적 수준이 올라간다. 자신이 도파민에 중독되어 가고 있음을 자각하여 알고리즘(algorithm)에 저항할 수 있는 브레이크를 갖게 되고, 타인의 완고함을 비난하기 전에 인간 구조의 나약함을 먼저 이해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들이 깨달은 진실

 

이러한 세대교체를 통한 변화의 원리는 과학철학에서도 그대로 증명된다.

 

양자역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결국 죽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토마스 쿤(Thomas Kuhn)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도 결국 시간의 흐름에 기댄다. 기성 패러다임 A가 지배하는 조직에 새로운 패러다임 B가 씨앗처럼 박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대교체(AAAAAAAAAB à ABBBBBBBBB)가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역사적 흐름이다.

 

신학이 과학을 품어야하는 이유

 

현대 교계에서 뜨거운 감자인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과학의 성과를 거부하고 문자주의적 창조론만을 고집하는 지금의 노년층에게 아무리 유전학의 증거를 들이밀어 보았자 설득은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신앙 패러다임은 인생 자체이기에 방어막이 풀리지 않는다. 결국 유신진화론이 대세가 되는 시점은, 과학을 상식으로 배우고 자란 젊은 세대가 교회의 주축이 되는 자연스러운 세대교체 이후에나 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지독한 '구조적 딜레마(dilemma)'가 도사리고 있다. 기성세대가 성벽을 꽁꽁 싸매고 새로운 시프트를 거부하는 동안, 지적 갈증을 느낀 젊은 인재들은 교회를 다 떠나버린다. 중간에 다음 세대(B)가 전멸하여 조직이 AAAAAAAAA 형태로 고립되면, 기성세대가 자연 퇴장했을 때 조직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멸, '(nothing)'의 상태로 증발해 버린다. 방주 자체가 침몰해 버린다면 패러다임 시프트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조직이 존속하지 않으면 그 어떤 진리도 담아낼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 먼저 깨달은 자들이 장외에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첫째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지적 겸손함(intellectual humility)을 스스로 깨우치고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다. 과학과 신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닫아걸었던 문을 열고, 거대한 진리 앞에서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둘째는 어떻게 하든 청년들을 붙잡는 일이다. 그들이 낡은 성벽에 질려 떠나가지 않도록, 그들의 지적 질문을 품어줄 수 있는 대안적 생태계와 플랫폼(platform)을 미리 튼튼하게 구축해 놓아야 한다. 비록 기존의 낡은 가죽부대가 터져버릴지라도, 준비된 청년들이 남아있어야만 그 너머에 새로운 지적·영적 방주를 재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말, 신학이 과학을 품고 다음 세대를 품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