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에서의 삶

신앙/신앙 사색

시간의 인과율, 신뢰의 강 그리고 믿음의 배

캐나다 제이슨 2026. 7. 12. 20:38

시간의 인과율, 신뢰의 강 그리고 믿음의 배

 

나는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 여러 목사님들의 말씀과 또 제자훈련등의 성경공부, 그리고 약간의 개인적인 연구가 사실상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신학적 고민을 달고 산다.

 

그중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존재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민을 해본다.

 

시간의 인과율이 주는 착각

 

하나님은 '피조물(Created being)'이 아니라 '자존자(Self-existent being)'이신 것,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소개하신 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솔직히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이다. 더 작은 존재가 더 큰 존재를 이해할 수 없기에, 사실 이해한다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매우 작은 하나님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사실 누가 만들었나?’라는 질문은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존재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이다. 시간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기에 시작이 없는 존재에게 '언제, 누가'를 묻는 것은 범주의 오류인 셈이다. 그 것은 마치파란색은 무슨 맛인가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잘못된 논리의 질문이다.

 

하나님은 여러 존재 중 가장 능력이 큰 '어떤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인 원인 그 자체이시다. 존재의 근원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이미 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만들어진 존재'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비디오 게임 속 캐릭터가 '이 게임을 만든 프로그래머는 누가 코딩했지?'라고 묻는 것과도 같다. 프로그래머는 게임 속 데이터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게임 밖의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더 근원적인 존재가 계속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인간이 '시간과 인과율'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원인이 필요 없는 단 하나의 기점'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이 우주가 성립한다. 바로 그 기점이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은 우리 존재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분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른 분이시다.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 19세기 말, 수학의 기초를 재정립하며 무한(Infinity)의 개념을 엄밀한 수학적 대상으로 끌어올린 집합론의 창시자이다. 사실 정수의 무한보다 실수의 무한이 더 크기 때문에 무한에도 급이 있다. 즉 비유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그 모든 '무한의 계층(Hierarchy of Infinities)'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크신 분, 혹은 그 모든 무한이 시작되는 '절대적 기점'이 되신다. 물론 이것은 수학적 비유일 뿐, 하나님을 수학적 개념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만약에, 어떤 중간적인 존재가 있어서 우리를 유한하게 내려다본다고 해도, 그 존재 또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는 '상위 피조물'일 뿐이지 그분이 하나님은 아니다. 혹시라도 그러한 인과론적 계층(Causal Hierarchy)이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근원이 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신뢰의 강과 믿음의 배

 

내재(Immanence)' '초월(Transcendence)'을 이해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따라서 '성육신(Incarnation)' 원리를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된 약속을 붙잡는 신뢰이다. 그래서 신앙은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이며, 관계의 시작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이해한다고 하지 않고, 믿는다고 한다.

 

청년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할까?’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이 악할 때, 가장 고통 받으시는 분이 누굴까? 이렇게 초라한 저자도 세상의 악함에 분노하고 슬퍼하는데,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얼마나 아파하실까? 양심,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과 같은 여러 장치를 해 놓으시고 문을 열어 놓았는데도 들어오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슬퍼하실까?

 

칼 바르트(Karl Barth)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같은 학자들이 평생을 바쳐 고민했던 '지옥의 끝' '모든 만물의 회복' , 보편화해(Universal Reconciliation)가 이루어질 지 아닐지,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신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아닌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면 잘 못 된 생각일까? 발타자르조차 희망할 수는 있으나 주장할 수는 없다라고 했기에,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아무런 갈등 없이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하나님을 배척한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오랜 시간의 사색과 고민 끝에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거부한다. 저자 역시, 어릴 적부터 과학적 사실과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의 충돌로 인해서 지속되었던 갈등을 넘어서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과학이라는 지성의 끝에서 겸손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겸손은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맞춰 저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청년들과 자라나는 세대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방법은 지금의 기성세대와 다르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기성 세대는 체험적 삶 속에서 얻어낸 겸손을 통해서 신뢰를 쌓아갔다. 하지만 청년들과 자라나는 세대는 과학적 지식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지성을 한도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그래야 그 끝에서 겸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은 우리를 진리의 문턱까지 잘 인도해 줄 수 있다. 지성이 없다면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서 신뢰를 찾으려 할 수 있다. 지성의 도움으로 제대로 된 방향을 잡으면, 청년들과 자라나는 세대들은 결국 신뢰의 강 앞에 도착할 것이다. 진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신뢰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라는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분이 원하시는 길로 가고자 작은 발걸음을 남기면서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