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의 캐나다 여행 가이드

Asia/China(10)

중국#48 - 눈물로 만난 홍구공원 윤봉길의사

캐나다제이슨 2011. 11. 21. 06:59

중국연수 6일차..

 

오늘은 상해의 중심부로 달려가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느끼고..

우리 조상들이 중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 답사를 떠납니다.

 

먼저 찾아가는 곳은 바로 홍구공원(虹口公園)입니다.

홍구공원은 바로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일어났던 바로 그 곳입니다.

 

버스를 타자 마음 속에 다소간의 복잡한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정말로 얼마나 많은 선열들의 피가 흘렀는지..

 

그렇게 버스는 상해의 중심부를 향해 달려갑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여기가 어디?

분명 상해의 한 곳이겠지요.

 

아.. 여기가 홍구공원입니다.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결코 작지 않은 공원입니다.

1932년 4월 29일 열혈청년인 윤봉길(尹奉吉)은 이 공원에서 일본군정요인들을 폭사시키는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열심히 기체조중인 사람들..

 

이 중국사람들도 이 곳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까요?

 

한가롭게 배드민턴 치는 분들..

그런데.. 정말 고수들이네요~~

저도 배드민턴은 대충 칠 줄 아는데.. 시합하면 절대로 안될 듯 합니다. ^^

 

이 공원을 들린 까닭이 보입니다.

 

매원(梅園)) 즉.. 매화동산 Plum Garden으로 번역해놓았네요.

 

입장료 내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한국사람들이기에 아예 한국말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홍구공원안의 호수는 그 옛날의 의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평화롭기만하고..

 

1994년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으로서 한국식 건물을 지으면서 매원으로 명명했습니다.

 

이 곳 이름이 매원이 된 것은.. 그의 호가 매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 24세의 꽃다운 나이..

그는 일신의 안녕보다는 조국의 꽃으로 산화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윤의사는 23살이 되던 해에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상해에서 그는 "한인애국단"의 김구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상해는 일제가 일으킨 1932년 발생한 1.28 사변으로 말미암아

일제와 국민당정부가 체결한 송호협정때문에 국민당군대가 철수하고 일본군대가 주둔하여있었기에

반일단체와 항일운동에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김구로부터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척살하기 위해 리봉창이 일본 도쿄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일본신문인 상해매일신문에 일본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경축대회를 여니

일본인거류민들은 밥곽과 물통 및 일장기를 가지고 입장하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를 본 한인애국단에서 이 기회에 일본침략자들을 징벌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때 윤봉길은 김구를 찾아 자기의 품은 뜻을 내놓았고 4월 20일 윤봉길은 이 의거를 맡을 의사로 정해졌습니다.

한인애국단은 20여차례의 실험을 거쳐 인화선을 당겨 4초만에 터지는 폭발력이 강한 폭탄을 만들어 준비했습니다.
4월 26일, 윤봉길은 김구선생남의 사회밑에 거사를 위한 선서를 한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4월 29일 아침 7시, 김구선생님이 차려준 고기반찬으로 조반을 치른 윤봉길 의사는

밥곽폭탄과 물병폭탄 그리고 일장기를 휴대하고 택시에 앉아 홍구공원으로 떠났습니다.

7시 50분에 공원부근에 이른 윤봉길 의사는 신사복에 스프링코트를 입고 밥곽과 물병으로 위장한 폭탄을 지니고 공원문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사열대 오른편 뒤쪽에 있는 일본인거류민속에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서 사열대까지는 19메터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11시가 되어 일본군 상해주둔군 총사령관 시로기와대장은 참모장 다시로 등 장교들을 거느리고 사열대에 올랐고...

일본군의 열병식이 끝난후 외빈들은 다 돌아가고 일본군민들만 남아 일본인거류민회의 주최밑에 축하회를 열었는데..

사열대에는 시로가와를 비롯한 일본군 제9사단장 쇼구다중장, 일본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리중장,

상해주재 일본공사 시게미쯔, 총령사 무라이, 상해거류민회 위원장 가와하라, 거류민회 서기장 도모도 등 7명이 한일자로 늘어서 있었고

이자들을 호위하기 위해 6명의 기병과 80여명의 일본헌병과 보조헌병들이 사열대앞이 죽 늘어서서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사회자인 도모노가 경축대회의 시작을 선포하고 개회사가 끝난후 전체 가립하여 기미가요를 불렀고..

11시 50분, 기미가요가 한창 불리고 있을 때..

윤봉길은 손에 들었던 밥곽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메였던 물병폭탄을 벗어들고..

일본사람들을 헤치고 몇걸음 앞으로 나가 인화선을 당기고 폭탄을 사열대를 향해 힘껏 던졌습니다. 
회의장은 삽시에 수라장이 되었고 윤봉길은 되돌아서서 땅에 놓았던 밥곽폭탄으로 자폭하려하였지만 일본헌병들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윤봉길의사가 던진 물병폭탄은 시로가와와 노무라의 앞에 떨어져 터졌으며 그외 5명도 모두 중상을 입고 불구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독이 오른 일본은 조선사람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였고 이 때 안창호선생님도 투옥되었다고 합니다.

김구선생님은 5월 10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4.29사건이 한인애국단애서 실시한 반일행동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고합니다.

 

5월 25일, 윤봉길의사는 사형판결을 받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12월 19일 오전 9시 40분, 시가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피끓는 최후를 마쳤습니다.

 

천천히 걸어갑니다.

 

매원을 따라 만들어진 수로를 따라 보트도 다니고..

 

건물 이름은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 그대로 매헌입니다.

 

자.. 들어가 볼까요?

 

민족의 청년 윤봉길..

 

그의 비장한 얼굴을 보니..

가슴 한쪽이 시려옵니다.

 

윤봉길 의사의 시계..

이후 김구선생의 시계가 됩니다만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백범일지에 그 사연이 나와있습니다.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소리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 시계는 김구선생님이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1층을 빠져나와 2층으로 향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젊은 청년이었지만..

이미 국내에서부터 항일투쟁을 해왔고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가족과 동포에게 각각 유언을 남겼습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아들 모순과 담에게 보내는 유언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동포에게 보내는 유언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 동포여러분, 나도 사람입니다.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요"

 

그의 유언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저절로 납니다.

 

광복후 그의 유해는 다행이도 고향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여기는 중국..

하지만 그 날의 그 의거가 있었던 그 장소..

 

이렇게 호수는 평화롭기만 한데..

 

오호라 부끄럽구나.

중국의 10억이 못한 일을 조선인 1명이 이루었구나

백년도 못사는 인생,

죽어서 천년의 이름을 떨치리라

 

장개석은 당시 윤봉길 의사의 이 의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때부터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일제에 맞서는 동지로서 인정하게 됩니다.

 

자.. 이제 그만 또 떠나야지요.

 

글/사진 : 제이슨

 

ps 제가 캐나다에 있는 관계로 이웃님들 방문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ps 추천은 반드시 읽고 나셔서~ 일괄 추천하지 말아주세요. 꾸벅~